광의의 재정정책 기조를 대변하는 변수가 통합재정수지다. 통계적으로는 정부가 관리하는 관리재정수지와 사회보장성기금수지를 더한 값이다. 지난 30년간 관리재정수지는 몇 년을 제외하곤 적자였던 반면 기금수지는 국민연금 흑자에 힘입어 계속 흑자였다. 경기 변동과 무관한 기금수지 흑자는 재정에 지속적인 긴축 편향을 초래하고 재정의 경기 조절 기능을 제약한다. 이러한 긴축 편향은 외환위기 이후 지속되고 있는 경상수지 흑자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최근 발표된 제5차 재정계산 시산 결과는 국민연금 적립 기금이 2040년에 1755조원으로 정점에 도달한 뒤 15년 만인 2055년에 소진(47조원)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장기성장전망을 이용해 필자가 시산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소진 속도는 평균 매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2.3%의 기금수지 적자에 해당한다. 지난 30년과는 정반대로 재정에 지속적인 확장 편향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역시 재정의 경기 조절 기능을 제약하는 동시에 인플레이션 압력이나 경상수지 적자 요인으로 작용한다.
기조적 편향성은 국민연금이 부과방식(pay-go)이 아니라 적립방식(funded)으로 설계된 것이 근본 원인이라 구조적 해결은 어렵다. 그럼에도 편향성을 줄이기 위해 연금 납부와 지급을 경기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방안 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자산 가격에 대한 영향은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 제기됐던 자산폭락가설(asset meltdown hypothesis)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미국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후 소비를 위해 보유 자산을 대거 매각해야 하지만 자산을 매입해 줄 청장년 세대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어 매입 여력이 부족한 관계로 자산 가격이 폭락할 것이라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나름의 명료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이유로 현실화하지 않았다. 첫째는 가설의 일부 오류다. 베이비붐 세대 은퇴와 같이 충분히 예견된 변화는 자산 가격에 선반영되므로 점진적 추세 하락은 몰라도 급격한 폭락 가능성은 작다. 보다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가 상당한 규모의 자산을 보유했지만 예상과 달리 은퇴 후에도 자산을 매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가설에 베이비붐 세대 대신 국민연금을 대입하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연금개혁이 늦어지면 국민연금은 2041년부터 매년 평균 120조원 규모의 대규모 자산 매각을 피할 길이 없다. 청장년 세대의 자산 매입 여력이 부족하다면 연금을 받게 될 은퇴 세대는 여력이 있을까. 현재와 같이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부실한 노후 대비 상황이 계속된다면 은퇴 세대가 수령한 연금은 저축돼 자산시장으로 환류되기보다는 소비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경험과 달리 자산 가격이 하락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자산 매각이 시작되기도 전에 자산 가격 하락세가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곧 국민연금 보유 자산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기금 소진 시점이 더 빨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국민연금 보유 자산의 절반이 해외 자산인 점은 긍정적이다. 해외 자산 매각은 국내 자산 가격에 영향이 없고 매각 대금은 GDP와 별도의 구매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외 자산 매각 대금이 국내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환율이 고평가되고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되는 부담이 발생할 수 있다. 미래의 일이라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그리 멀지도 않은 미래에 닥칠 일이다. 정부와 정치권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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