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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대한항공은 마일리지 공제 기준을 ‘지역’에서 ‘운항 거리’로 바꾸려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국제선의 경우 4개 지역별로 소비자가 지불해야 할 마일리지가 달랐습니다. 이것을 운항 거리에 비례해 국제선 10개로 세분화하려 했습니다. 이용 노선의 실제 거리에 따라 공제 수준을 결정하는 게 ‘합리적 기준’이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꾸면, 미국이나 유럽 같은 장거리 여행에서 마일리지를 이용하려는 소비자의 부담이 더 커집니다. 예를 들어 ‘인천~뉴욕’ 여행을 위해 프레스티지석(비즈니스석) 보너스 항공권을 구매하려면 편도 6만2500마일이 필요했던 것이 9만 마일로 늘어납니다. 소비자로선 자신이 모은 마일리지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죠. 물론 단거리 등 일부 구간의 경우 필요한 마일리지가 줄어들긴 하지만, 이런 구간은 마일리지 활용도가 장거리보다 떨어집니다.
소비자들은 반발했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고요. 올해 4월부터 새로운 마일리지 제도를 시행하려던 대한항공은 결국 물러섰습니다. 고객 의견을 수렴해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기업이 마일리지 제도를 도입하는 이유를 알아봅시다. 마일리지 제도를 운용하는 기업은 대개 약관에 그 내용을 담고, 그런 약관이 공정한지는 정부 부처에서 심사합니다. 약관이 무엇인지, 정부의 약관 규제는 어떻게 정당성을 확보하는지도 함께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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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리지, 포인트, 쿠폰 모두 기업(혹은 식당)이 소비자에게 단골손님이 돼달라고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은 소비자가 즉시 사용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일정량을 모아야 쓸 수 있습니다. 중국집 쿠폰을 20장 모으면 그것으로 탕수육을 시킬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단골 고객의 다른 말은 ‘상용 고객’입니다. 여기서 상용은 한자 항상 상(常)과 쓸 용(用)을 사용해 ‘일상적으로 늘 쓴다’는 의미입니다. 기업에는 자사 상품이나 서비스를 일상적으로 늘 쓰는 고객이니까 단골 고객이죠. 그래서 마일리지 제도를 ‘상용고객 우대 제도’라고 부릅니다.
항공사가 단골 고객에게 보상을 준 사례로 유명한 것은 1979년 미국 웨스턴 에어라인의 ‘트래블 패스 프로그램’입니다. 이 항공사는 자사 항공기를 다섯 번 이용한 고객에게 50달러짜리 여행권을 줬습니다. 중국집 쿠폰과 비슷하죠.
이후 1981년 역시 미국 항공사인 아메리칸 에어라인이 ‘마일리지 제도’를 처음 도입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대한항공이 1984년 처음 시작했습니다. 초기엔 마일리지를 지급한 항공사에서만 그 마일리지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점차 이용 범위가 확대돼 항공사들이 제휴를 맺은 여러 기업에서 쓸 수 있게 됐습니다.
항공 마일리지를 채권으로 인정하면, 그것을 지급한 항공사는 부채를 안게 됩니다. 그래서 국내외 항공사들은 한사코 마일리지가 ‘무상으로 제공한 보너스, 경품, 덤’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마일리지를 재산권으로 인정하면 부채가 생길 뿐만 아니라 마일리지 제도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을 정하거나 변경하려고 할 때 자유롭게 할 수 없고 채권자(마일리지를 가진 소비자)의 요구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항공사들의 바람과 달리 현실에선 마일리지가 부채로 통합니다. 기업의 경영실적을 정리한 재무제표에서 항공 마일리지는 부채로 간주됩니다. 대한항공의 경우 마일리지 부채가 3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일리지 제도는 소비자가 지불한 가격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소비자를 유인하는 수단입니다. 가격할인 제도와 달리, 일정량을 모아야 쓸 수 있기 때문에 소비자를 단골 고객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가격할인 제도는 구매 시점에 혜택을 받고, 마일리지 제도는 장래의 일정 시점에 혜택을 받는다는 점도 두 제도의 차이입니다.
2. 마일리지가 항공사의 부채인 이유를 설명해보자.
3. 마일리지 제도와 가격할인 제도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마일리지 제도에서는 △마일리지 지급 시 계산 방법(예를 들어 비행거리의 1배 혹은 1.2배 등) △마일리지 사용 조건(보너스 항공권 구매에 필요한 마일리지 등) △마일리지 양도 및 상속 가능 여부 △마일리지 사용 가능 기간(소멸시효) 등이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약관을 매우 자주 접합니다. 많은 소비자와 동일한 거래를 하는 기업이라면 으레 약관을 사용하기 때문이죠. PC나 스마트폰으로 물건을 구매할 때는 물론이고 오프라인 매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약관에 동의하세요’라는 제안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은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는 약관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약관의 존재 자체를 신경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소비자가 약관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이번 대한항공 사례처럼 약관이 바뀔 때입니다. 요즘은 기업들이 약관을 바꾸려 할 때 기존 고객에게 카카오톡 등으로 약관 개정 사실을 알립니다. 약관이 언제부터 어떻게 바뀌는지 알려주면서, 약관 변경에 동의하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계약 해지 의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약관 변경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하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기업이 일방적으로 약관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약관을 바꾸려면 정부 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의 약관 심사를 거치게 됩니다. 이번에 대한항공 마일리지 변경이 이슈가 되자, 공정위는 관련 약관을 심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매년 공정위에는 수백 건의 약관 심사 요청이 들어옵니다.
공정위는 약관이 공정한지를 심사합니다. 심사 결과 약관이 불공정하면 해당 약관 조항을 삭제하라고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고, 기업이 행정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징역이나 벌금을 부과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결했습니다.(판결문의 특성상 표현이 딱딱해서 그 취지를 이해하기 쉽게 풀었습니다)
『약관은 기업이 다수의 고객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그런데 고객이 그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하거나 확인할 충분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계약이 이뤄질 수 있다. 따라서 약관이 사적 자치의 영역에 속하더라도 그 내용이 고객의 정당한 이익과 합리적인 기대에 반하면 약관 조항을 무효로 한다고 해서 사적 자치의 원칙에 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대법원의 판결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특히 ‘고객이 그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하거나 확인할 충분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계약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은 우리 현실을 잘 반영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정부의 사적 자치 영역에 대한 개입(규제)은 언제나 그 정당성이 잘 지켜져야 합니다. 소비자 보호라는 명분은 분명히 중요하지만, 정부의 사적 자치 영역에 대한 무분별한 혹은 과도한 개입은 경계해야겠지요.
2. 사적 자치의 원칙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3. 정부 약관 규제의 정당성에 대해 토론해보자.
장경영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longr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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