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간 경색된 한·일 관계를 방치하지 않고, 국익 차원에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박진 외교부 장관)
정부가 6일 발표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은 교착된 한·일 관계를 한국 주도로 정상화하겠다는 ‘대승적 결단’이라는 평가다. 엄중한 국제정세 속에서 양국 관계 개선의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도 작용했다. 박 장관이 “외교, 경제, 안보 모든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의 협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며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한 배경이다. 여기에 징용 피해자들이 고령인 만큼 대법원 확정판결을 존중하면서 실질적인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는 시급성도 고려됐다.
정부 관계자는 “강제징용 문제의 미해결 상태가 장기화하며 한·일, 한·미·일에 전략적으로 이익이 되는 협력 기회가 지속적으로 상실됐다”며 “반목과 갈등을 넘어 미래로 나아가는 결단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7월 “외교적 협의가 진행 중”이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해 대법원 결정을 잠시 멈췄고 한·일 간 협상을 서둘렀다. 양국 간 협상이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먼저 일본에 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제시하며 호응을 촉구한 것이다.
한·일 안보협력의 필요성은 지난해 9월 이후 높아진 북한의 무력도발 수위와 비례해 커졌다. 지난해 10월 북한이 쏘아올린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인 화성-12형은 일본 상공을 지나 북태평양에 떨어졌다. 지난달 18일에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이 일본 홋카이도 서쪽 200㎞ 지역에 탄착했다. 이런 위협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서는 ‘종료 통보’ 상태인 지소미아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게 한·일 양국의 판단이다.
세계적인 공급망 재편은 한·일 협력을 복원해야 할 또 다른 이유다. 2019년 문재인 정부가 소재·부품·장비 독립을 외치며 한·일 경제전쟁을 주도할 당시보다 공급망 블록화 현상이 더 심화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공급망 위기 이후 각각 주요 동맹국을 중심으로 공급망을 다시 짜고 있다. 반도체 산업 등에서 긴밀히 얽혀 있는 한·일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 산업 분야에서 양국이 경쟁하는 부분도 있지만 협력해야 할 부분이 더 많다”고 전했다.
이지평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과 특임교수는 “한국이 메모리반도체와 파운드리에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극자외선(EUV) 포토마스크 같은 부품, 에폭시수지·불화수소 등과 같은 소재는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며 “양국 협력의 시너지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인엽 기자 insid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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