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디트스위스(CS)의 몰락은 금융 중심지 스위스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
스위스 2위 은행 CS가 유동성 위기 끝에 UBS에 인수된 다음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전한 스위스인들의 반응이다. CS의 몰락이 스위스인들에게 그만큼 큰 충격을 줬다는 내용이었다. 금융업은 시계 등 정밀 기계공업과 함께 스위스를 대표하는 산업이다. 특히 스위스 은행은 자산가들의 ‘비밀 계좌’로 유명하다. 이번 CS 사태로 비밀 계좌로 상징되는 스위스 은행의 명성에도 금이 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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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유로든 재산을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비밀 계좌의 고객이다. 스위스은행협회(SBA)에 따르면 스위스 은행들은 2021년 기준 2조6000억달러(약 3340조원)의 외국인 예금을 보유하고 있다. 올해 한국 정부 예산(639조원)의 다섯 배가 넘는 규모다. 전 세계 은행이 보유한 외국인 예금의 4분의 1 이상이 스위스 은행에 예치돼 있다.
역설적이게도 초기 스위스 은행의 주요 고객은 프랑스 왕족들이었다. 주변국과 전쟁을 치르는 데 돈이 필요했던 그들은 스위스 위그노들에게 돈을 빌렸다. 자신들이 쫓아낸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는 것이 계면쩍었는지 이들은 돈을 빌린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고 요구했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가 태동한 연유다.
영세 중립국이라는 국제 정치적 지위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스위스는 전쟁 중에도 재산을 안전하게 도피시킬 수 있는 안전처로 통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럽 각국이 전비 조달을 위해 부자에게 세금을 올리자 과세 회피 목적의 거금이 스위스 은행에 몰렸다.
스위스는 1934년 연방 은행 및 저축은행법을 개정해 은행이 고객 동의 없이 계좌 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고, 위반한 사람은 5년 이하 징역과 25만스위스프랑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유대인들은 나치 독일의 추적을 피해 재산을 스위스 은행에 숨겼다. 유대인을 탄압한 히틀러가 비자금을 넣어둔 곳도 스위스 은행이었다.
결국 스위스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도한 ‘은행정보 자동교환에 관한 국제협약(AEOI)’에 2017년 가입했다. 현재 스위스는 회원국 과세당국이 원할 경우 해당국 국민이 보유한 스위스 은행 내 계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스위스는 여전히 예금 고객의 비밀을 잘 지켜주는 나라에 속한다. 세계조세정의네트워크가 매년 발표하는 금융비밀지수에서 지난해 스위스는 미국에 이어 2위에 올라 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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