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방금하신 말씀은 성희롱에 해당될 수 있으니 말씀을 삼가 주십시오. 그리고 정확한 상담을 위해 통화를 녹음하겠습니다. (녹음 실시) 성희롱을 지속하실 경우에 관련 법령에 따라서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정부가 지난해 7월 개정한 공무원 민원 응대 매뉴얼이다.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는 민원처리담당자 보호조치의 하나로 민원인의 폭언·폭행 등이 발생했거나 발생하려는 때에 증거 수집 등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서 휴대용 영상음성기록 장비, 녹음 전화 등의 운영을 민원처리법 시행령 제4조 제1항에 규정했다.
중앙부처와 전국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일부 악성 민원인의 성희롱과 폭언, 폭행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시·군·구 등 민원실 직원은 청사를 찾아온 민원인의 직접적인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민원인 출입이 제한된 정부세종청사 등 중앙부처는 직접적인 폭언과 폭행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만, 폭언과 욕설 전화를 받는 경우는 수두룩하다. 부처 조직도에 담당자의 사무실 전화번호가 일일이 공개돼 있기 때문이다.
악성 민원인의 행태도 다양하다. 행안부는 악성 민원인을 크게 4가지 특이민원으로 분류하고 있다. 우선 공무원들에게 욕설과 협박 등 폭언을 하는 민원인이다. 두 번째는 성희롱을 일삼는 민원인이다. 이 밖에도 상급자(기관장 등) 통화요구, 장시간 통화 및 반복 전화 등으로 분류했다.
일선 동사무소에선 민원실 공무원들에게 수시로 막말이나 반말하는 경우는 워낙 많기 때문에 특이민원으로 보기도 어렵다는 것이 지자체 공무원들의 공통적인 설명이다. 이른바 ‘갑(甲)질’은 통상 우월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 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민원실에선 갑질을 하는 일반 시민들이 적지 않다. 60~70대뿐만 아니라 20~30대 청년들도 민원실만 오면 반말하거나 목소리부터 높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동사무소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중앙부처는 지자체에 비해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악성 민원인들에게 시달리는 건 마찬가지다. 문제는 폭언이나 성희롱을 하지 않더라도 온종일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공무원을 괴롭히는 민원인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기획재정부에서 근무하는 한 주무관은 “종합부동산세 부과 관련 기재부에서 왜 그런 정책을 만들었냐며 낮이며 밤이며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는 민원인들이 있다”며 “전화를 끊으면 왜 끊었냐고 소리치면서 담당 국장을 바꾸라고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공무원들이 악성 민원인에게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행안부는 지난해 7월 악성 민원인만 녹음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민원처리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위법행위 증거 수집 등을 위해 불가피한 경우에 국한된다.
악성 민원인이라도 할지라도 녹음의 필요성과 범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것이다. 행안부의 이 같은 조치에도 일선 현장에서 공무원들이 악성 민원인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근로자의 날인 지난 1일, 고용노동부 천안고용노동지청 소속 근로감독관 A씨가 아산의 한 주차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입사 1년이 채 안 된 A씨는 업무처리 중에 발생한 일에 대해 민원인으로부터 지속적인 항의를 받으면서 심적 부담을 느껴왔다고 한다. 민원인은 A씨를 비롯해 담당 과장, 지청장 등 상급자까지 함께 직무 유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지난달에는 경기 구리시의 한 행정복지센터에서 민원인 응대 업무를 하던 신입 공무원 B씨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B씨는 악성 민원인을 상대하면서 심적 고통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렇다 보니 기업이나 콜센터처럼 통화연결음에 녹음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넣는 중앙부처도 등장했다. 인사혁신처는 정부 중앙부처 중 처음으로 올해부터 전화 폭언 방지 안내 음성 메시지를 내보내고 있다. ‘통화연결 후 민원 응대 직원 보호를 위해 통화 내용이 녹음될 수 있습니다’, ‘잠시 후 통화할 직원은 누군가의 소중한 직원입니다’ 등의 메시지다.
행안부는 민원 처리 공무원이 안전한 근무환경에서 민원인에게 고품질의 서비스 제공할 수 있도록 일선 행정기관 담당자 의견을 수렴하고 관련 제도를 개선하는 등 더욱 노력하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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