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커플링과 디리스킹의 실체는 게임이론을 통해 보면 명확해진다. 각국 간 관계를 조명할 때 자주 활용되는 이 이론은 참가국 간 승자와 패자가 분명하게 판가름 나는 노이먼-내시 식 게임과 모두에 이익이 되는 섀플리-로스 식 게임으로 나뉜다. 디커플링은 이기적 게임인 전자에, 디리스킹은 공생적 게임인 후자에 해당한다.
1970년대 들어서자마자 ‘핑퐁 외교’로 상징되는 미·중 관계는 커플링(동조화)에서 출발했다. 지난달 27일로 100세를 맞은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끌어냈다. 닉슨 방문 후 베트남전 종전이 선언된 데 이어 1979년에는 미·중 국교가 수립됐다. 이후 2012년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기 직전까지 미·중 간 관계는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변된다. 1989년 존 윌리엄슨 미국 정치경제학자가 제시한 이 개념은 중국을 포함한 비(非)서구 국가를 글로벌 시장경제에 편입해 궁극적으로 미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전략을 말한다.
중국이 미국과 국교를 수립한 후 대외경제정책 기조로 내세운 ‘도광양회(韜光養晦: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린다)’도 워싱턴 컨센서스와 대립하지 않았다. 오히려 2차대전 이후 유럽 부흥에 기여한 ‘마셜플랜’으로 부를 정도로 중국이 성장하고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데 도움이 됐다.
중국의 WTO 가입은 세계 모든 국가와 기업을 대중국 편향적으로 만들었다. 중국이 없으면 대외 경제정책이나 기업 경영전략이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중국 경제는 고도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국민총소득(GNI)이 WTO 가입 직전 미국의 17% 수준에서 시 주석이 취임하기 직전에는 55%로 세 배 이상으로 높아졌다.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글로벌 시대에 동참해 급성장한 것이 미국에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이면에는 미국과의 경제 패권 경쟁자로 키우지 않았느냐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미·중 관계가 커플링에서 디커플링으로 변해야 한다는 시각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중국 중심의 세계 경제질서인 팍스시니카 야망을 꿈꾸던 시 주석은 취임하자마자 대외 경제정책 기조를 ‘주동작위(主動作爲: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낸다)’로 급선회했다. 행동계획으로 일대일로, 위안화 국제화, 제조업 2025, 디지털위안화 기축통화 구상 등 중국의 세력 확장 전략인 베이징 컨센서스를 차례로 추진해 나갔다.
두 컨센서스 간 충돌이 정점에 이른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중국 견제 전략인 ‘나바로 패러다임’을 추진할 때다. 초강경 중국견제론자로 알려진 피터 나바로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함무라비법전 식으로 중국을 철저하게 배제해 나가는 디커플링 전략을 추진했다.
중국 견제라는 관점에서 나바로 패러다임은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조 바이든 정부 출범 직전 중국의 GNI는 미국의 75% 수준까지 올라왔다. 골드만삭스 등은 바이든 대통령의 연임을 가정해 집권 기간인 2027년에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시 주석의 팍스시니카 야망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자신의 집권 기간에 경제패권을 중국에 넘겨준다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대 굴욕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대중국 견제 수위를 높인 것은 이 때문이다. 미·중 관계 개선에 다리를 놨던 키신저가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 3차대전을 우려할 정도로 위기에 처하자 디커플링 전략의 한계를 반성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먼저 손을 내민 쪽은 중국이다. 중앙아시아 정상회의를 계기로 ‘정랭경온(政冷經溫: 정치 군사적으로 냉랭한 관계 속 경제적으로 친밀한 관계)’ 기류로 바뀌면서 미국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등을 잇달아 초청하고 있다. 미국도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지난 2년 동안 가려졌던 수정된 워싱턴 컨센서스인 ‘설리번 패러다임’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중 관계가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 시대로 넘어가 대립에서 공존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인가. 엔데믹 시대에 세계 경제와 증시를 비롯한 국제금융시장, 그리고 한국 경제의 앞날을 좌우할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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