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불법파업에 참여한 노동조합원에게 기업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는 조합원별로 책임 정도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 대표적이다. 산업계에선 이 판결의 당사자인 현대자동차처럼 생산라인을 점거당해 손해를 봤더라도 쟁의행위를 한 조합원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훨씬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를 쏟아내고 있다.
현재 국회 본회의에 올라있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 제3조와 쟁점이 유사했기 때문에 사법부가 먼저 노란봉투법의 정당성을 인정한 셈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대법원이 지난 5월 “근로자 과반의 동의 없이는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바꿀 수 없다”고 판결한 것도 비슷한 사례다. 법원은 이 판결 전까지 45년간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 없이 이뤄진 취업규칙 변경이라도 사회 통념상 합리성을 갖췄다면 효력을 인정해왔다.
하지만 오랫동안 유지된 판례가 깨지면서 기업 경영진은 작성·변경권이 있음에도 취업규칙을 바꾸기 쉽지 않아졌다. 대법원이 작년 5월 “합리적 이유 없이 나이만으로 직원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는 무효”라는 판결 역시 상당한 파장을 일으키며 노사간 소송전에 불을 붙였다.
오는 18일 대법관 두 명이 바뀌면 대법원의 이 같은 움직임에도 다소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진보 성향인 박정화 대법관과 중도 성향인 조재연 대법관 대신 중도로 분류되는 권 후보자와 서 후보자가 합류하면 대법원 진보파는 6명으로 줄어든다. 오는 9월 말 퇴임을 앞둔 김 대법원장의 후임까지 진보나 보수 성향의 인물로 결정되면 진보 대법관 수는 5명이 된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사법부가 정치화됐다는 인식이 강해진 상황에서 김 대법원장이 또 한 번 전원합의체를 꾸려 민감한 사건을 판단한다면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더 떨어뜨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이 원심을 뒤집는 판결을 내놓으면 원청은 하청 근로자들의 연이은 교섭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뿐만 아니라 하청 노조가 원청 사업장에서 쟁의를 벌이는 것도 허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 소송의 쟁점은 “사용자의 개념 범위와 노동쟁의 대상을 확대한다”는 노란봉투법 제2조의 내용과 비슷하다.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만한 사건이기 때문에 전원합의체에 회부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근로자들이 경영성과급이 평균임금에 해당하는지 두고 근로자들과 벌이고 있는 퇴직금 청구소송도 주목받는 사건이다. 일단 두 회사 모두 원심에서 승소했지만 같은 쟁점을 두고 벌어진 다른 하급심 사례 중에선 근로자 측이 이긴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에 최종결과를 예측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재직 중인 근로자만 받도록 규정된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인지를 두고 세아베스틸과 근로자들이 다투는 소송 역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한 노동전문 변호사는 “진보 세력의 과반 구성이 곧 종료될뿐만 아니라 새 대법관들이 오자마자 민감한 사건을 판단하기도 어렵다”며 “올해 안에는 대법원이 전원합의체를 꾸려 쟁점이 첨예한 노동사건을 판결하는 일이 또 나오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민경진/김진성 기자 mi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