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의가 느껴지는 책들이 있다. 유난히 두껍거나 논쟁적 주제의 책은 예사롭게 보고 넘길 수 없다. 최근 한국어로 처음 번역·출간된 <생물학적 풍요>가 바로 그런 책이다. 동아시아출판사가 새로 선보인 의치약·생명공학 브랜드 ‘히포크라테스’의 첫 번째 책으로 동물 동성애를 다뤘다. 책 한 권이 1356쪽. 웬만한 책의 두 배가 넘는다.
‘성적 다양성과 섹슈얼리티의 과학.’ 부제가 책의 내용을 훌륭하게 요약한다. 20세기 후반까지 과학적으로 문서화된 동물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 섹슈얼리티 연구를 총정리한 백과사전이다. 원서가 출간된 1999년 미국 뉴욕 공립도서관이 ‘올해의 기념비적 책’으로 꼽았고, 200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소도미법(동성 간 성행위를 금지한 법) 폐지 판결에서 인용됐다. 저자는 캐나다 출신 생물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브루스 배게밀이다.
동물이 애정을 표현하고 짝짓는 방식은 예상 밖으로 다양하다. 동성애 행동은 전 세계 450여 종의 동물에서 발견되며 특정 지역이나 동물군에 한정되지 않는다.
단순히 ‘동물들도 동성애를 한다’는 내용 때문에 이 책이 주목받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이 책의 태도다. 배게밀 이전 서구 학자들도 동물 동성애 문제를 다뤘지만 이성애와 번식 중심주의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동성 동물끼리 구애활동을 하거나 교미를 시도하는 건 이성 간 관계 맺기에 실패한 뒤 그를 대체하는 것쯤으로 여겼다. 혹은 병에 의해 발생하는 오류라고 봤다. 인간 사회에 퍼진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동물 연구에 덧씌운 것이다.
<생물학적 풍요>의 태도는 다르다. 일단 동물 동성애를 성행위에 한정하지 않고 구애, 애정, 성행위, 짝 결합, 육아 등 다섯 가지 범주로 분류해 접근한다. 저자는 “우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기이하다”는 영국 진화생물학자 존 홀데인의 말을 인용하며 인간의 잣대로 자연을 속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물론 동물 행동에 대한 모든 연구는 결국 인간의 해석일 수밖에 없다. 책은 그것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른 책들과 차별성이 있다. “동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직접 말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동물 행동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찰에 의존해야 한다.”
제목인 ‘생물학적 풍요’는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의 일반경제 이론을 차용해 저자 배게밀이 제안한 개념이다. 바타유는 과잉과 풍요가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고 봤다. 모든 유기체는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으므로 여러 방식으로 과잉 에너지를 ‘탕진’한다. 배게밀은 이 이론을 생물학에 적용해 동성애, 비생식적 이성애 등 ‘자손을 남기지 않은 다양한 관계 맺기’는 생물계 풍요를 나타내는 여러 표현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동물에 대한 책이지만 독자는 결국 ‘사랑’과 ‘가족’에 대한 인간 사회의 정의를 생각하게 된다. 성애 없는 애착관계는 사랑인가. 그때 우정과 사랑의 차이는. 번식을 가정하지 않는 성애는 사랑이 아닐까. 그렇다면 ‘딩크족’(맞벌이 무자녀 가정)은. 이 책이 20여 년 뒤 한국 사회에 도착했음에도 여전히 새로운 이유다.
들고 다니며 읽을 엄두가 안 나는 무게인데, 출판사는 당분간 전자책을 출간할 계획이 없다고 했다. 특정 부분만 검색해서 읽기보다는 두고두고 깊이 읽히는 책이 되기를 바라서다. ‘활자의 풍요’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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