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끝까지 질문을 던져보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소위 힘이 있다는 법조계, 금융계, 교육계, 언론계 모두가 과거의 경험에 매몰돼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과거의 실적(은행), 사실(언론), 사건(법률), 경험(교육)은 모두 이미 일어난 것을 다루는 일이다. 미래를 이야기해야 할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 업의 본질상 과거 지향적이라고 정의하면 잘못일까?
오히려 과거와 단절돼 새로운 미래를 만들고자 하는 혁신적인 스타트업은 실적이 없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꿈을 펼치기 어려운 환경이다. 이게 당연한 일일까. 혁신은 과연 계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 벤처캐피털(VC)들은 투자 결정을 할 때 변화 가능성보다 실적을 중요한 평가 요소로 보고 있다. 출자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데, 이것이 진정 출자자들이 원하는 스타트업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을까? 투자금 회수 경험과 수익률만 보는 출자자들은 정상적인 것일까? 스타트업과 운용사의 혁신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계량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그러면 혁신 스타트업이 한국에서 투자받아 성장하는 일이 가능하긴 한 걸까?
백미러를 보고 운전한다는 건 전장의 경계병이 눈앞의 적보다 순찰하는 장교의 움직임을 경계 대상으로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이게 진정 원하는 일인가. 다시 근본적인 질문 하나. 혁신이나 새로움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과거의 경험으로 평가할 수 있는 혁신은 혁신이 아니지 않나? 미국에서 성공한 모델은 비교군으로 계량 평가하고, 세상에 없는 모델과 제품은 정성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아니 할 수 없는 구조의 펀드가 많다. 이게 모험자본의 역할은 아니지 않은가.
스타트업으로 가야 할 자본 자체보다 전달기관의 산업화에 신경 쓰는 게 진정 우리가 원하는 구조인가? 자본시장의 거대한 자본이 스타트업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정부 예산에만 의존하는 것이 혹시나 VC 그들만의 갈라파고스적인 리그 문제 때문은 아닐까? 부분적으론 합리적 결정이더라도 다른 결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여러 부조리가 벌어지는 것 아닌가 말이다. 은행에서 일할 때 새긴 격언을 하나 더 소개한다. “믿기 위해 의심하는 것이다.” 목표는 믿을 수 있는지고 의심과 분석은 수단일 뿐이라는 얘기다. 수단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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