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사업자(판매기관)가 연말에 주로 내놓는 원금리보장 고금리 특판 상품이 이르면 다음달 사라질 전망이다. 이런 상품은 판매기관이 상품 제공기관에게 수수료를 줘야 만들 수 있는데, 금융당국이 "시장 질서를 교란한다"는 이유로 이 수수료를 금지할 방침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고금리 상품이 나오는 걸 막아 소비자 선택권을 침해한다"는 주장과 "과당경쟁으로 시장이 왜곡되는 걸 막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금융위가 규정을 이렇게 바꾸는 건 퇴직연금 시장의 과당경쟁을 막겠다는 취지에서다. 판매기관이 제공기관에게 수수료를 주면 판매기관은 그 대가로 고금리 기초자산을 제공 받을 수 있고, 이를 활용해 고금리 퇴직연금 상품을 만들 수 있다. 판매기관이 고율의 수수료를 주면 시장금리보다 훨씬 높은 퇴직연금 상품도 만들 수 있다. 이는 '소비자를 끌어오기 위해 역마진을 감수하는 과당경쟁'이라는 게 금융당국의 시각이다.
퇴직연금 판매기관인 A은행은 이달 초부터 3년 만기 5.85%, 5년 만기 6%짜리 퇴직연금 원리금 보장 상품을 판매 중이다. 이 상품의 기초자산은 B증권사에서 제공받는 파생결합사채(ELB)다. A은행은 이 ELB를 제공받는 대가로 B증권사에게 수수료 1.2%를 준다. 금융위 방침대로 사업자간 수수료가 금지되면 해당 ELB의 금리는 4%대로 떨어지고, A은행의 이런 특판 상품은 자취를 감출 가능성이 높다.
A은행이 이 ELB를 활용해 고금리 퇴직연금 상품을 제공하는 건, 당장 마진을 줄이더라도 이용자 수를 늘릴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국투자신탁운용에 따르면 퇴직연금 시장은 지난해 말 340조원에서 2032년 860조원 규모로 10년간 3배 가까이 커질 전망이다. 최근 A은행이 특판 상품을 낸 건 연말에 퇴직연금 납입 기관을 바꾸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금융위는 이런 특판 상품이 시장 질서를 교란한다고 본다. 금융위 관계자는 "판매기관은 이런 상품을 일부 대기업 근로자에게만 제공하고 모든 소비자에게 똑같이 제공하지 않는다"며 "판매·제공기관간 수수료를 금지하면 시장 금리를 넘어서는 특판 상품을 낼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이같은 소비자 차별이 사라지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A은행은 "자사 홈페이지에 해당 상품 금리를 공시했고, 구입 자격 제한도 두고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한 개인 투자자는 "대기업에 대한 차별적 제공이 문제라면 차별을 금지하는 식으로 핀셋 규제를 하면 될 일"이라며 "상품이 아예 나오지 못하게 막아 차별을 해소하겠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발상"이라고 했다.
배홍 금융소비자연맹 보험국장은 "고금리 상품을 제공할 여력이 있는 일부 대형 금융사에 수요가 쏠리는 걸 막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경쟁력 있는 상품을 못내게 해 시장 균형을 맞추겠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소비자들은 위험(리스크), 편의성 등 다양한 측면을 보고 금융기관을 선택한다"며 "금리 하나만 보고 특정 기관으로 소비자가 몰린다는 것도 기우"라고 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대부분의 퇴직연금 사업자는 이번 조치에 찬성하는 입장"이라며 "기존대로라면 건전한 경쟁이 훼손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금융위의 이번 조치에는 사업자들의 민원도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배 국장은 "경쟁없이 편하게 마진을 챙기고 싶다는 사업자의 바람에 금융당국이 응하는 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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