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과도기 정부 행정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행정위원회 산하엔 재정경제위원회가 있었다. 이 조직은 국가 경제를 계획하고 건설 관리를 담당했다. 천윈과 보이보의 주도 아래 재정경제위원회는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체제 구축에 핵심적이고 독점적인 역할을 했다. 이 위원회의 우선 목표는 국가 경제 질서 복원, 가격 안정, 화폐 안정, 계획된 경제의 관리 메커니즘 설정, 그리고 '제1차 5개년 계획' 준비였다.
1953년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 주요 혁명 세력의 지휘 아래 중국은 경제적 기반을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구축할 준비가 된 것이다. 중국 정부는 사회주의 경제구축과 성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소련의 경제 모델을 채택했다. 앞서 소련은 기업의 국영화, 대규모 집단 농업 그리고 중앙집중식 경제 계획을 채택했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방침은 '제1차 5개년 계획(1953- 1957)'에 반영됐다.
소련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제1차 5개년 계획은 중공업과 자본 집약적·기술 기반 공업을 발전시켜 경제성장률을 높이려 했다. 소련 정부 당국자들은 중국 관료들이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줬다. 대규모의 소련 엔지니어, 기술자, 과학자는 중국에서 새로운 중공업 시설을 개발하고 설치하는 데 일조했으며 중국은 소련에서 공장설비, 중장비를 수입했다.
처음부터 소련과 중국 공산당이 친밀했던 것은 아니다.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5년 소련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중소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소련은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군을 몰아내고 만주로 진군한 소련군은 도합 50억달러에 달하는 공업시설과 금괴 그리고 8억5000만위안의 만주국 화폐를 몰수했던 바 있다. 여기에 더해 소련은 외몽골과 신장에 괴뢰정부를 수립해 중국 정부를 자극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는 깊은 감정의 골과 정치·외교적 문제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직후인 1949년 12월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70세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만나주지 않다가 중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면담을 했고, 중국과 소련은 원조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 결과, 1950년 2월 14일 중국과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는 중국과 소련이 서로 경제 지원을 제공하고 필요한 경제 협력을 수행한다는 내용이 포함돼있다. 조약에 따라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3억달러의 차관을 받았고, 공장설비 및 중장비를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짜는 아니었다. 중국은 외몽골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신장의 광산을 소련과 공동으로 개발해야 했다. 또 만주의 철도이용권, 뤼순·다롄의 사용권을 소련에 제공했다. 다만 소련의 경제원조로 인해 중국은 첫 5개년 경제 발전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다.
소련의 원조를 받는 동안 중국 정부는 채찍과 당근을 활용해 기업 소유주들이 기업을 국가에 판매하도록 설득했다. 1956년까지 중국 내 대부분의 대규모 상업 및 산업이 국유화됐으며 도시의 거의 모든 사적 사업소유권이 사라졌다. 사회주의 경제 체제 구축 작업은 단기적으로 빛을 발했다. 1955년 중국의 국가 생산력은 31% 증가했다. 그러나 모든 정책이 그렇듯이 사적인 시장 활동은 암암리에 명맥을 이어갔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홍기훈 홍익대학교 경영대 교수, 메타버스금융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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