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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브계 여성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첫 장편소설 <애니 존>은 안티과섬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엄마와의 애증 관계를 강렬하게 그린 작품이다. <애니 존>은 애니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로 끝을 맺는다. 5년 후 펴낸 <루시>는 주인공이 고향을 떠나 미국에 도착하는 날로 시작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다르지만, <루시>는 <애니 존>의 후속 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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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의 마음을 들끓게 만드는 그의 부모와 가난한 고향은 그리움과 증오라는 양가감정으로 그녀를 괴롭힌다. 아홉 살까지 외동이던 루시는 이후 5년 동안 남동생 셋이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다. 아빠는 그렇다 쳐도 엄마까지 아들만 바라보는 상황에서 루시는 가족과의 절연을 계획한다. 엄마로부터 “악마 이름을 붙인 거야. 루시는 루시퍼를 줄인 거지. 하여튼 내 뱃속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얼마나 성가셨던지”라는 말을 듣고 “사는 일이 냉랭하고 고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1632년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안티과섬은 1981년에 독립했지만, 지금도 영연방에 속해 있다. 당시엔 경제 상황이 열악한 탓에 가사 도우미나 입주 보모를 하러 미국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많았다. 킨케이드도 17세에 뉴욕시 상류층 가정에 들어가 입주 보모 일을 시작했다.
<루시>의 주인공이 머라이어의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장면에는 킨케이드의 실제 체험이 많이 녹아들었을 것이다. 내 나라가 너무 가난해 남의 나라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것은 힘들기 그지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데,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문학을 통해 표출한 예는 없는 듯하다. <루시>는 카리브해 출신이 뉴욕의 삶을 날것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대단히 가치 있으면서 흥미롭다.
“가진 게 너무 없어서 벌어지는 일들은 하도 많이 봐서 뻔한” 루시가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일어나는 불행을 바라보면 재미도 있고 기분 전환이 되는 경험”을 전하는 소설이다.
“가정교육이라고 해봤자 난잡한 여자로 자라지 않도록 단속하는 게 전부 아니었냐. 날 그렇게 키워봤자 다 헛것이었다. 사실 난잡하게 사는 게 아주 즐거우니 됐다. 감사하다”라고 쓰면서 집에 영영 안 돌아갈 것이라고 못 박는다. 루시는 머라이어의 집에서 나와 페기와 함께 살 집을 구하며 홀로서기를 결심한다. 머라이어가 선물로 준 공책에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루시 조지핀 포터’라는 이름과 함께 “사랑해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쓴 뒤 하염없이 우는 모습으로 소설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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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 소설 <루시>에 나타난 반항심과 독립심으로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헤쳐나간 저메이카 킨케이드, 그녀의 삶이 소설 못지않은 울림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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