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보험료율 인상 목표 등 어떤 구체적 ‘숫자’도 담겨 있지 않은 ‘맹탕’ 국민연금 개혁안을 내놨다. 연금개혁을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아온 문재인 정부에서 제시했던 ‘사지선다’안보다도 오히려 후퇴한 수준이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조정 등 민감한 내용은 모두 “국회와 공론화를 거치겠다”며 책임을 미뤘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국익’보단 당장의 ‘득표’에만 골몰한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이 나온다.
보건복지부는 27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발표했다.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해 8월 국민연금 장기 재정 추계를 위한 재정추계전문위원회를 가동하며 밑작업에 착수한지 약 1년 2개월만이다.
앞서 발표된 5차 재정계산 결과 현행 제도(보험료율 9%, 소득대체율 40%, 지급개시연령 65세)가 유지될 경우 국민연금은 2040년 1755조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55년 완전 고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제도 개선 방안을 제시하는 자문기구인 재정계산위원회는 지난 9월 보험료율 12%·15%·18%, 수급 개시 연령 66세·67세·68세, 국민연금 기금 수익률 0.5%포인트(p), 1%p 상향 등 변수를 조합한 18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했고, 최종적으론 소득대체율을 45% 또는 50%로 올리는 선택지를 포함한 24개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24개 시나리로로 ‘맹탕’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재정계산위는 추계 기간인 2093년에도 기금 고갈을 막을 수 있는 선택지로 보험료율을 15%로 높이고 지급개시연령을 68세로, 기금운용수익률을 1%포인트 높이는 안을 부각시켜 ‘더 내고 늦게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정부에 제시했다.
하지만 오랜 논의가 무색하게 복지부는 보험료율, 소득대체율, 지급개시연령 조정 등 연금개혁의 핵심 요소들에 대해선 어떠한 구체적 수치도 제시하지 않았다. ‘더 내는’ 개혁을 의미하는 보험료율 인상에 대해선 “지속가능성 제고를 위해 점진적인 보험료율 인상이 불가피하다”면서도 인상 수준에 대해선 “의견이 다양한 만큼 공론화를 통해 구체화하겠다”고만 밝혔다.
‘더 받는’ 개혁을 위한 소득대체율 조정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양한만큼 구체적 수준에 대해선 공론화 과정에서 의견을 수렴한다”며 결정을 차후로 미뤘다. 현재 40%인 명목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것에 대해 “(소득대체율 상향 시)보험료율 인상이 불가피하므로 미래세대의 부담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부정적인 시각일 일부 표출했지만 확답은 피했다.
‘늦게 받는’ 연금 지급연령 상향 논의는 사실상 이번 정부 임기 중엔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 복지부는 “수급개시연령 추가 조정은 은퇴 후 소득공백 확대를 감안해 고령자 계속고용 여건이 성숙된 이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1998년 연금개혁으로 지급개시연령이 2033년까지 65세로 높아지는 상황에서 굳이 현 정부에서 총대를 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결국 연금개혁의 핵심인 보험료, 소득대체율, 지급개시연령에 대해 아무런 목표치를 제시하지 않은 셈으로, 사실상 ‘맹탕 개혁안’이다.
맹탕 개혁안은 “표를 잃어도 개혁하겠다”던 윤석열 대통령의 그간 발언과는 정반대다. 숫자 없는 연금개혁안은 그간 정부와 여당이 날을 세워 비판해온 문재인 정부의 소위 '사지선다안'보다도 퇴행한 결과다. 문정부는 사지선다 안 가운데 보험료율을 12%로 높이고 소득대체율은 당시 수준인 45%으로 유지하는 안과, 보험료율을 13%로 높이면서 소득대체율은 50%로 높이는 두 가지 모수개혁안을 포함시켰다.
이를 두고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윤 대통령과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율이 30%초반대에 머무는 등 전망이 어두워지자 일단 표심을 건드리지 않는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모수개혁 등 핵심 논의를 국회에서 추진하는 공론화 과정에 부치기로 했다. 책임을 사실상 국회에 떠넘긴 셈이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개혁안에 구체적 숫자를 어느 것도 제시하지 않은 것은 정말 무책임한 결정"이라며 "연금개혁의 시간을 오히려 후퇴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황정환/허세민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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