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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금융위원회가 2025년으로 예고했던 상장 대기업 ESG 공시 의무화 시점을 2026년 이후로 유예한다고 발표했다. 아직 국내 ESG 공시 기준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년부터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재계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기후대응 경쟁력의 퇴보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구체적인 유예 기한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규제의 불확실성을 오히려 높였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기준과 규칙을 만드는 것은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기후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글로벌 차원에서 기후 공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라는 공감대가 확산하는 분위기다. 국내의 상황과 관계없이 이미 글로벌 차원에서는 새로운 룰 세팅이 이루어지고 있다.
글로벌은 룰 세팅 진행 중
지난해 3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모든 상장 기업에 적용될 기후변화 정보공시 지침의 초안을 발표했으며, 올해 연말까지 최종안을 낼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지침은 온실가스 스코프(Scope) 3, 즉 기업의 활동과 연관된 전 밸류체인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배출 공시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책적 변화로 꼽힌다. 산업계와 SEC 사이에도 해당 지침 이행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원안대로라면 미국 내 상장 대기업은 2024년 회계연도부터 스코프 3 기후공시를 이행해야 하며, 중소, 중견기업 역시 점진적으로 이행할 의무를 지게 된다.
국제지속가능성 기준위원회(ISSB)도 지난 6월 지속가능성과 기후변화 대응 요구를 포괄한 ESG 공시기준 최종안을 내놓았다. 유럽 집행위원회는 7월 말, 지속가능성 보고기준(ESRD)의 최종본을 입법했다. 유럽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말 초안을 공개한 이후 각계의 의견 수렴을 거쳐 최종적으로 750인 미만의 사업장에 대한 보고 의무를 최대 1~2년까지 유예하는 방안, 사업과 관련된 정보 공개 항목을 기업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 자발적인 데이터 포인트를 수용하는 방안 등을 수용했다. 이로써 상장 대기업은 2024년 회계연도부터, 중소기업은 2026년 회계연도부터 공시를 이행해야 한다. 기업의 규모와 사업환경에 따른 차이를 인정해 단계적 도입을 허용하면서도 무조건적인 유예가 합리적인 답은 아니라는 입장을 재확인한 셈이다.
국내 기후공시 의무가 얼마간 미뤄지더라도, 미국과 유럽, 그 외 가장 널리 통용될 기준인 ISSB의 ESG 기준을 준용할 시장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는 한국 기업은 이러한 글로벌 기준 공표에 대응해야 한다. 해외 사업장이 있거나, 수출하는 기업뿐만 아니라 공급망이 걸쳐 있는 모든 기업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해외 고객사나 협력사의 탄소 정보공개 요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때, 실제 사업적 기회를 놓치게 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
선점할 것인가 밀려날 것인가
기후공시와 환경 규제는 리스크 관점에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지속가능성 추구가 강력한 기업 경쟁력을 만들어 낸다고 판단한 기업들은 규제보다 반보쯤 앞서 선제적인 기후대응 로드맵을 고민하고, 이에 따라 비즈니스 구조를 재편해왔다.
2022년 초에 발간된 세계경제포럼(WEF) 자료에 따르면, 기후대응 측면에서 앞서 나간 기업들은 더 높은 매출과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더 낮은 비용으로 자본을 조달하고, 인재를 채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자본 비용의 경우 시멘트·항공·자동차·석유와 같은 탄소 집약적 산업에서 기후 대응에 앞선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의 편차가 훨씬 더 벌어졌다.
기업의 탄소 회계, 왜 어려운가
1. 기준이 변한다
기후변화 시나리오는 변화하고, 기후과학 연구 방법론도 진화한다. 일회성으로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고 단기 자문에 기반한 보고서를 발간하는 일이 기업의 기후대응 전략이 될 수 없는 이유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기업 전체의 장기적인 탄소중립 로드맵을 만드는 것이고, 그 목표를 위한 전략은 정기적으로 점검되고 수정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직마다 신뢰할 수 있는 탄소 회계시스템을 갖춰야 하는데, 탄소배출 데이터 포인트를 수집·관리하고, 정합성을 검증하는 데만 해도 상당히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향후 국제 공시를 위해서는 제3기관으로부터 인증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기업이 온전히 조직 내부의 힘으로만 탄소 회계 관리를 수행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기후과학에 대한 전문성이 부족한 탓에, 기존 ERP 시스템에 탄소 회계 모듈을 추가하려는 시도 역시 대부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2. 글로벌과 로컬 상황, 둘 다 밝아야 한다
머지않아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 정립되겠지만, 국가별, 지역별 상황에 따라 실제적인 탄소 감축 이행 목표와 규제 조건은 다르게 적용될 것이다. 한두 개의 플랫폼이 글로벌 탄소 회계 시장 전체를 장악하기가 현실에서는 어려울 것이라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기업이 영위하는 사업 분야뿐만 아니라 소재 국가나 지역의 정책 상황을 즉각적으로 감지하고 적용할 수 있는 대응력이 필요하다.
3. 유연한 시스템이 유리하다
기존 시스템뿐만 아니라 공급망 관리 차원에서 조직 외부와도 연동될 수 있는 유연성이 상당히 중요하다. 디지털 전환이 늦었거나 보수적인 정보 관리 체계를 따라야 하는 조직일수록 배출량 측정에 소모되는 시간과 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다.
급격히 성장 중인 탄소 회계 SaaS
기업이 본격적으로 탄소중립 이행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지원하기 위한 탄소 회계 관리 시장의 성장세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전 세계 탄소 회계 관리 소프트웨어 시장은 2023년 153억달러 규모에서 2030년까지 644억달러로 4배 이상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연평균 성장률은 22.8%에 달한다.
이미 2021년 미국 페르세포니(Persefoni)가 TPG 라이즈 펀드, 프렐류드벤처스 등으로부터 1억달러 이상의 투자금을 유치하며 탄소 회계 SaaS 시장 확대의 가능성을 알렸다. 이듬해 실리콘밸리의 테크기업을 중심으로 고객군을 넓혀온 워터셰드(Watershed)는 7000만달러를 조달하면서 기업가치 10억 달러로 기후 테크 유니콘 반열에 올랐다.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SAP, 세일즈포스 등 기존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기업들도 탄소 측정을 지원하는 서비스를 앞다퉈 추가하고 나섰다.
페르세포니나 워터셰드가 초기부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탄소 배출량 측정만이 아니라 기후 대응과 관련된 모든 항목과 과정을 한 곳에서 통제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엔츠(AENTS)가 유사한 관점으로 '엔스코프'라는 통합 솔루션을 제공 중이다. 엔츠 역시 탄소 배출량 측정·분석·보고를 넘어 감축과 거래에 이르기까지 탄소중립 업무 전반을 포괄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 덕분에 출시 1년이 채 안 된 시점부터 유료 고객을 확보했으며, SK에코플랜트 등 국내 대기업과 플랫폼 고도화를 위한 협업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탄소 통합 솔루션은 기업이 소유한 모든 사업장, 공급망, 소비자 범위의 직·간접적 탄소 배출량(Scope 1, 2, 3)뿐만 아니라, RE100, 폐기물 배출, 전 과정 평가(Life Cycle Assessment)에 이르기까지 기업 활동과 직결된 환경 요인을 측정하고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데 이점이 있다. 측정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과다 배출 원인을 진단하고 감축 방안을 분석한 후에는 TCFD(기후변화 관련 재부 정보 공개 협의체), GRI(글로벌 리포팅 이니셔티브) 등 다양하게 요구되는 표준화된 탄소 정보로 보고하기 쉬워진다. 보고와 공시 이후에는 신재생에너지 구매, 친환경 방식의 폐기물 처리와 같이 즉시 적용할 수 있는 탄소 감축 방안을 찾고, 자발적 배출권 거래를 탐색하는 것도 가능하다.
최근에는 탄소 회계 솔루션이 다양화되면서, 기능적 측면에서 특화된 탄소 회계 서비스도 속속 등장했다. 독일 스타트업 클리마틱(Climatiq)은 탄소 배출량을 계산하는 API를 개발해 무료로 접근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탄소 회계 엔진만 제공하는 셈이다. 전 세계 주요 배출계수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확충하고, 이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공개함으로써 탄소 회계 도입을 촉진하겠다는 의도다.
미국 캘리포니아 기반의 패치 테크놀로지(Patch Technologies)는 자발적 탄소배출권 거래를 위한 API를 제공한다. 최소 규모의 제한 없이 소규모로도 탄소배출권을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목표를 내건 회사다.
202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한 신생 스타트업 카본브라이트(CarbonBright)는 소비재에 특화한 탄소발자국 관리 서비스를 내세웠다. 제품이 생산되고 사용되고 폐기되는 전 과정(cradle-to-grave)에 걸쳐 배출되는 탄소의 양을 제품 단위로 측정한다. 데이터 과학에 기반해 실제 데이터와 차이가 날 수 있는 부분을 보정하고 독립된 적합성 평가 기관과 협력하여 방법론을 검증한다.
성패는 스코프 3 배출량 관리에 달렸다
기후공시는 실행 과정상 여러 쟁점이 존재하지만, 본질적인 성패는 스코프 3 배출량까지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스코프 3은 기업의 전체 공급망 차원에서 본 탄소 배출량이며, 조직 외에서 발생하는 간접적인 배출량 중 스코프 2(에너지 사용에 따른 탄소 배출량)를 제외한 부분을 의미한다. 스코프 2도 탄소배출 포인트가 조직 외부라는 점에서 간접성이 있지만 비교적 명확한 측정이 가능하다는 차원에서 완전한 간접 배출에 해당하는 스코프 3과 분리된다. 기업이 거래하는 모든 거래처의 탄소 배출량을 추적하는 일은 상당히 까다롭지만, 종합적인 탄소 배출량을 따져야만 궁극적인 탄소중립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포기할 수도 없는 문제다.
스코프 3까지 제대로 측정하고 관리하려면, 스코프 1, 2의 측정과 관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스코프 1, 2 공시가 모두에 의무화되지 않는다면 스코프 3의 많은 부분을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직접 조사한 데이터가 아닌 2차 데이터를 어디까지 준용할 것인가도 쟁점이 된다.
2차 데이터를 제공하는 플랫폼마다 추정하는 기준과 알고리즘이 다르기 때문에, 스코프 1, 2에서부터 배출량의 누락이나 중복합산이 일어날 확률도 높아진다. 이러한 방식이라면 스코프 3 배출량은 실제와의 오차가 상당히 커진다. 이에 근거한 기업의 탈탄소 로드맵과 전략 수립, 배출권 거래 과정에서도 오차 조정이 불가피하다. 이러한 오류를 피하자고 스코프 3을 기업의 자발성 영역에 남겨둔다면, 애초에 그린 워싱(green washing)을 묵과한다는 지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최근에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E-라이어빌러티(environmental liability)라는 개념도 등장했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하고 이를 출하 또는 제공하기까지(cradle-to-gate), 그러니까 기업의 활동과 직결된 탄소 배출량을 최대한 정확하게 산정하는 방식에 근간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업의 재무적 정보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데이터를 반영함으로써 실제로 기업의 환경 영향을 감사 가능한 요소로 규정해야만 스코프 3을 제대로 측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E-라이어빌러티의 출발점이 되었다.
기업이 재무 공시에 준하는 기후공시를 이행해야 하는 시점에선 탄소중립 전환의 성과가 가장 우선적인 기업 경쟁력 지표가 된다. 공격적인 정책과 입법 예고, 도전적인 목표 설정은 그 자체로 시그널이 되어 시장을 빠르게 움직인다. 이에 대응하려는 기업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면 그들을 돕는 촉매 역할을 하는 솔루션이 등장하면서, 전체적인 전환의 속도를 높인다. 국내의 상황과 관계없이 이미 글로벌 차원에서는 새로운 룰 세팅이 이루어지고 있다. 빠르면 기회, 늦으면 비용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한 조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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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원 인비저닝파트너스 수석심사역 ㅣ 대학에서 전산학을 전공한 변호사·변리사로, 지식재산권과 영업비밀 분야의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인비저닝 파트너스에 합류하기 직전 옐로우독 심사역으로 재직했고, 로펌과 특허법인, 벤처캐피털을 두루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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