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재정은 중앙 정부만의 준거 틀이 아니다. 지방 재정을 돕고 감시·감독도 하는 행정안전부가 예산 시즌을 맞아 지방자치단체에도 이를 역설해왔다. 엊그제 보통교부세 운용원칙 발표 때도 강조됐다. 교부세가 11조원이상 줄어드니 지자체마다 비상이다. 건전재정은 명분·취지 다 분명한 시대적 과제지만 재정 현실에선 반기는 이가 없는 무서운 원칙이다.
건전재정 깃발은 추경호 경제팀의 첫 번째 성과다. 어떤 예산 항목이든 집행 기관이 있다. 뒤에는 매달려온 무수한 이익 그룹도 있다. 이른바 ‘예산 주인’들이다. 예산을 둘러싼 도전과 압력은 여권 내부에서도 만만찮다. ‘대통령 뜻’도 앞세울 것이다. 이들을 상대로 ‘칼질’하며 증액을 2%대로 묶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국회 심의, 본 게임이 남았으니 아직 속단은 이르다. 더구나 국회는 차원이 다르다. 여의도 선수들은 하이에나 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예산전쟁에서 야당은 거칠고 일방적이다. 가뜩이나 재정을 한껏 풀라며 별러온 과반 다수당이다. 예산지출에 관한 한 여당 의원도 못 믿는다. 이들도 관심사는 오로지 내년 선거다. 총선은 불과 다섯 달 남았다. 추경호 경제팀장은 용기를 잃지 않고 뚝심을 발휘해낼까. 정기국회 후반전 핵심 관전 포인트다. 2%대가 무너지면 윤석열 정부의 건전재정 깃발은 날아가 버린다.
거시정책 운용도 비교적 무난했다. 올해 경제성장률이 1%대에 그치지만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소용돌이 와중에 해외 여건까지 보면 누가 해도 용빼는 재주를 발휘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세 번째, 굳이 잘했다기보다 크게 실수하지 않은 것도 평가할 만하다. 반도체 지원책이 이나마 오는데도 곡절이 컸다. 한국은행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과의 정책 조율에서도 드러난 하자는 없었다. 마찰음 내지 않은 것도 성과라면 성과다.
추 부총리의 과(過)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국민연금 개혁을 보건복지부에 맡긴 채 손 놓은 것이다. 부처 속성과 업무관행상 복지부 역량을 넘어서는 국가적 과제다. 진짜 문제는 기금 고갈이 뻔한데도 나중에 못 받을 것이라고 여기는 가입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역대 정부가 그렇게 호도해왔다. 법에 명시된 ‘재정추계’ 조항에 따라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야 할 책무가 정부에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정부의 직접 지급보증이나 예산투입을 통한 기금고갈 해소가 현행법 내에선 불가능하다.
중차대한 이 딜레마를 푸는 일이야말로 경제부총리 책무다. 그런 일 하라고 그냥 장관이 아니라 부총리 타이틀을 부여한 것이다. 기획재정부엔 예산실도 있고 세제실도 있다. 노동·교육개혁 모두 제대로 성과를 못 낸 터에 연금개혁까지 판만 넓어지니 어쩔 셈인지 딱하다. 집권 전반기 황금 같은 시일 다 보내고 있다. 법적 성격이 제각각인 모든 연금을 다 뜯어고치라는 것도 아니다. 국민연금만이라도 어떻게 좀 해보라는 주문이다. 추 부총리가 이제라도 팔 걷고 지속가능한 모델로 개선을 주도한다면 복지부에 미뤄온 과는 공으로 바뀔 수 있다.
또 다른 허물은 공공부문에서 변화를 내지 못한 것이다. 기재부에는 공공기관운영법이라는 강력한 법이 있다. 공기업 다루는 데 노하우를 쌓아온 공공정책국도 있다. 그런데도 거대 공기업은 그대로다. 하루가 다르게 AI(인공지능)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마당에 직무급제 성과급제 유연근무제 등 그 어떤 것이라도 제대로 도입한 것이 있나. 주뼛주뼛하는 사이 전기요금은 정치요금이 돼버렸다. 공공요금이 실제 비중 이상으로 ‘한국형 정치·사회 아젠다’로 변질되는 데는 경제부총리 책임도 있다. 세 번째는 문제의 지방교육재정을 외면해온 것이다. 학령인구 급감에도 매년 급증하는 교육청 예산은 모순덩어리다. 교육계 일부 빼고 온 나라가 요구해온 개혁 대상이다. 행안부가 적극 나섰고 기재부도 동의는 했으니 2 대 1 싸움인데도 교육부를 못 이긴다. 예산과 세제, 국가 운영의 두 칼은 어디에 쓸 셈인가.
경제 선장 추 부총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 기껏해야 연말까지 정도다. ‘공(功)3 과(過)3’을 ‘공4 과2’로라도 돌리려면 서둘러야 한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