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미술사는 잘못됐다. 미술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오는 20일 국내 개봉하는 1시간34분짜리 다큐멘터리 ‘힐마 아프 클린트-미래를 위한 그림’을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다소 발칙한 주장이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다큐 제목이자 주인공인 힐마 아프 클린트 때문이다.
스웨덴 여성 화가인 클린트는 오랫동안 잊혀진 화가였다. 그의 이름을 보고 많은 사람이 “클림트를 잘못 쓴 거 아니야?”라고 얘기할 정도로. 사실 그는 남녀 통틀어 최초로 추상화를 그린 화가다. ‘추상화의 선구자’로 알려진 바실리 칸딘스키보다 5년 일찍 추상화를 그렸다. 그런데도 그는 세계 미술사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 다큐는 후대 화가, 미술사학자, 과학사학자 등의 입을 빌려 클린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왜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그의 작품이 왜 중요한지 등을 다룬다. 그가 남긴 1500점의 그림과 2만6000쪽에 달하는 노트가 다큐의 바탕이 됐다.
클린트는 가난에 허덕이던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랐다. 부잣집에서 태어났고, 스톡홀름 북쪽에 있는 카를베리성에서 자랐다. 해군이던 아버지는 클린트에게 수학, 천문학, 항해술 등을 가르쳤다. 이후 그는 스웨덴 왕립미술학교에 진학했다.
풍족한 삶이었지만 그를 붙잡은 건 ‘성별’이었다. 당시 여성은 결혼하기 전까지만 예술을 할 수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면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가 그린 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형태를 그린 것에 통달한 그는 원자부터 신지학(神智學: 영적 세계를 철학적·종교적으로 탐구하는 학문)까지 현실 그 너머에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기하학으로 나타냈다.
이런 업적에도 왜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다큐는 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그림을 그렸다는 점, 생전 전시를 잘 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백인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서 여성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는 점을 그가 소외된 배경으로 꼽는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그는 2019년 미국 뉴욕 구겐하임에서 열린 회고전이 60만 명이란 흥행 기록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조명받았다. 이 다큐도 2019년 해외에서 먼저 개봉했다.
클린트의 삶과 작품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도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 홍보대사를 맡은 이숙경 영국 휘트워스 미술관장은 “클린트의 발견은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미술사가 좀 더 균형적으로 발전해나가는 큰 계기가 됐다”고 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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