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시대착오적 동일인 제도…찔끔 손볼 게 아니라 폐지가 답이다

입력 2023-12-27 17:54  

공정거래위원회가 기업집단을 지정할 때 동일인(총수)을 판단하는 기준을 정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국적과 관계없이 국내에서 사업하는 기업을 실제로 지배하면 기업의 동일인으로 하되, 자연인 대신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할 수 있는 예외 조항을 새로 마련한 게 핵심이다.

시행령 개정 논의는 2021년 쿠팡이 자산 5조원 이상의 공시대상기업집단에 지정되면서 시작됐다. 공정위는 당시 ‘제도적 미비’를 이유로 한국계 미국인인 김범석 쿠팡Inc 의장 대신 쿠팡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했다. 그러자 국내 기업인과의 형평성 및 역차별 논란이 불거졌다. 이번 개정안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연인이 있더라도 국내 회사 등을 동일인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한 예외 조항이다.

쿠팡과 같은 대기업 출현에 따라 제도를 바꿔야 할 정도로 동일인 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총수가 되면 국내외 계열사 공시 및 자료 제출 의무가 생기고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받는다. 얼굴도 모르는 먼 친인척의 사업 현황과 보유 지분 신고를 누락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자칫 총수 부재 상황이 발생하면 투자 결정은 사실상 올스톱된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는 투자 확대에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 현행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자산 5조원 이상 공시대상기업집단 소속 국내 회사는 동일인과 그 친족이 지분을 20% 이상 보유한 다른 계열사에 일감을 몰아주거나 사업 기회를 제공하는 등의 방식으로 부당한 이익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익 편취를 판단하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감 몰아주기라는 비판을 감내하면서까지 신사업 투자를 결정하기는 어렵다는 게 경제계의 반복된 하소연이다.

동일인 제도는 1980년대 대기업의 독과점과 소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재벌 체제 견제를 위해 도입할 때만 해도 당위성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총수 말 한마디로 그룹을 좌지우지하던 시대가 아니다. 독립 경영이 뿌리내렸고, 대주주 견제 장치도 촘촘하다. 한국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는 찔끔 손볼 게 아니라 과감하게 없애는 게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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