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이들이여 서로 껴안으라,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
프리드리히 실러 ‘환희의 송가’ 가사에 맞춰 현과 관, 타악, 저음과 고음 남녀 가수, 합창단이 함께 빚어낸 절절한 선율이 무대에서 객석으로 폭포처럼 쏟아졌다. 2023년이 저물기 나흘 전인 지난 27일, 롯데콘서트홀에서 펼쳐진 무대에서다. 이승원이 지휘한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은 이날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연주했다.
한 해 동안 즐거웠던 일, 기념할 일, 또 서러웠던 일, 잊고 싶은 일이 한꺼번에 씻겨나갔다. 교향곡을 듣는 80분 동안 올해도 잘 살았다는 위로에 뭉클했고, 새로운 한 해의 희망이 꿈틀댔다.
신시내티 심포니 수석부지휘자 이승원은 4악장 내내 암보로 지휘했다. 그 많은 음표를 머릿속에 다 담았다. 그는 급하지 않게 악단을 몰고 갔다.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되는 듯한 1악장 서두부터 과도하지 않은 표현으로 출발했다. 저음의 양감이 부족하게 느껴졌지만, 악기 간의 응답이 충실했고 정리돼 있었다.
휘몰아칠 때도 음량만 커지는 게 아니라 ‘에지(edge)’를 살리는 지휘의 묘미가 돋보였다. 목관악기 중에는 플루트와 오보에 콤비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어떤 때는 이 두 악기의 노래를 오케스트라 전체가 숨죽이고 귀 기울이고 있는 듯했다. 초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지휘자의 정교한 바통 테크닉은 곡 전체에 신뢰를 입혔다. 그는 1악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처절한 감정을 다소 희생하면서 멜로디를 살렸다. 안개 자욱한 마지막 총주에서 팀파니가 강렬하게 타격했다.
2악장에서 각 악기가 여유 있게 질주하는 템포 설정은 빈약할 수도 있었던 악단에 튼실한 보디감을 입혔다. 느긋한 템포로 많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디테일에 신경 써야 하는데, 잘 정리된 부분도 있었지만 악기들의 실수도 귀에 들어왔다. 오보에, 바순에 이어 첼로가 주제를 연주하는 부분의 자애로움은 이날 연주 최고의 순간 중 하나였다.
2악장을 듣다 보니 이 ‘합창’의 시선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원들은 겸허하고 능동적인 자세로 ‘선택과 집중’을 했다. 연말을 따스하게 하는 사려 깊고 다정한 연주였다. 표현이 부드럽고 담백해 과장이 없어 좋았지만, 돌파하며 나아가는 베토벤적인 단호함이 그리워질 때도 있었다.
느린 3악장 도입부에서는 산들바람처럼 잔잔하고 부드러운 현 속에 호른과 목관악기가 녹아들었다. 현악군의 노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루만졌다. ‘정중동’. 느리면서도 굼뜨지 않았다. 이승원은 명쾌하게 곡을 풀어내며 작품을 음미할 수 있도록 맛을 살렸다. 총주에서 관악군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마무리는 아름다웠다.
한경아르떼필은 4악장에서도 충분히 호흡하는 접근법을 견지했다. 치고받는 응답의 균형도 느껴졌다. ‘환희의 송가’가 첼로와 베이스로 시작해 비올라를 거쳐 바이올린에 이르자 앙상블에 혈색이 돌았다. 점차 수위를 높이며 감도는 따스한 포용력은 감동적이었다. 꾹꾹 눌러 밟듯 나아가는 해석이었다.
베이스 전승현의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를 시작으로 솔로이스트들이 나섰다. 전승현은 기존의 엄숙함과 달리 오페라같이 불렀다. 메조소프라노 양송미의 가창은 안정감이 있었고, 테너 정호윤은 도시적이고 말쑥한 노래를 선보였다. 가장 돋보인 독창자는 낭랑한 고음을 선보인 소프라노 박소영이었다. 노이오페라코러스의 합창은 고르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다 덮는 합창의 힘을 발산했다. 축제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 한경아르떼필은 피날레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내며 끝을 맺었다.
중간 휴식 없이 한번에 완주하는 ‘합창’ 뒤엔 앙코르가 없는 경우가 많지만, 이날 연주 뒤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 애국가의 멜로디였고 오래전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 때 울려 퍼지던 ‘석별의 정’ 선율은 한 해의 끝자락에 듣는 베토벤 ‘합창’과 어울리는 맛있는 디저트였다.
류태형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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