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핵심기술 보유 기업의 해외 합병과 합작투자 때 정부 사전 승인을 받게 하도록 산업기술보호법(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반도체 배터리 등 해외 사업이 많은 대형 수출기업 다수에 해당하는 중요한 법안이다 보니 산업계의 관심이 크다. 이 법이 던지는 쟁점은 분명하다. 치열해지는 기술경쟁 시대에 무리를 해서라도 한국의 전략적 핵심기술을 보호할 것인가, 규제 혁파로 외국인투자를 확대하고 국내 글로벌 대기업들이 수출에도 적극 나서게 지원할 때인가, 서로 다른 두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에 이 법이 있다. 핵심기술을 지키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기업들은 새로운 규제라고 반대한다. 반면 정부는 보조금까지 들어간 첨단기술을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승인제는 필요한가.
기술 보호 및 관련 규제의 강화는 근래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국제적 추세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다. 중국을 의식한 미국 정부가 이 법을 만들어 반도체 공정 등 미국의 첨단 기술과 장비 이전을 막고 있다. 미국은 자국으로의 수출 및 투자 기업에 대해서는 제3국 국적이라도 다양한 규제를 한다. 중국도 경제안보를 이유로 외국인 투자안보심사 제도를 운용한다. 이런 추세에 우리도 발맞춰야 한다. 국가의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 기술에 대한 기업의 책임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는 데 기업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사전승인제도는 인가를 해주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관련 과정, 즉 절차를 강화하겠다는 정도다. 최근의 기술유출 사례를 보면 상황이 심각하다. 한국의 전략 산업이자 최대 수출 산업인 반도체 공장의 설계도가 통째로 유출됐다가 적발된 사례가 있다. 잠수함 기술이 유출된 일도 있었다.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의 수출형 잠수함의 경우 무려 2000쪽 분량의 설계 도면이 대만에 돌아다녔는데도 해당 기업이나 한국의 보안 당국은 모르고 있었다. 기술 유출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 단적인 예다. 이제라도 국가적 전략기술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모든 조치를 다해야 한다.
문제의 신설 규제 조항은 “국가 핵심기술을 보유한 대상 기관과 외국인이 해외 인수·합병, 합작투자 등을 진행하려는 경우 미리 공동으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다. 신고 정도가 아니라 ‘의무적 사전 승인’을 받고 해외 사업을 추진하라는 강제 조치다. 반도체·배터리·바이오·모빌리티 등을 비롯한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기존의 상식 틀을 다 뛰어넘을 정도로 합종연횡의 공동투자가 이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기업이 제대로 투자에 나서기 어렵게 만드는 규제다.
IRA를 보면 미국도 이런 보호주의 정책을 펴기는 한다. 하지만 한국은 국제적으로 미국처럼 ‘갑’이 아니다. 글로벌 대기업이 일본·유럽·대만 등지의 대체 투자 파트너가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에 온갖 서류를 다 내고 기술을 노출하면서까지 한국 기업과 공동투자에 기꺼이 나설 이유가 있을까. 이 법이 외국 기업의 한국 내 투자 및 한국 기업과의 합작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우려다. 오죽하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심의 단계에서 야당(더불어민주당) 의원까지 “기업의 생명인 첨단기술을 행정기관이 틀어쥐고 조정하겠다는 것이 지금 윤석열 정부의 대한민국 구조와 맞나”라며 드러내놓고 반대를 했다. 국가 핵심기술 여부를 정부가 판단해 관련 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행정권력 남용의 소지가 있다. 규제투성이 속에서 첨단산업 발전은 어렵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수석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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