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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얼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황홀한 이상향이었다가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가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사랑의 이야기다. 사랑을 잃은 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사랑의 희미해진 기억뿐이다.
나는 인생의 상류인 젊은 날에서 멀리 떠밀려 왔다. 인생의 하류에서 돌아보니, 저 멀리 한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나는 사랑에 도취해 청맹과니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아득한 기억이지만 그랬을 것이다. 사랑을 잃은 자는 사랑으로 빛나던 얼굴을 망각 속에 박제한다. 아, 나는 사랑을 잃었다. 상실의 고통은 오래 남지만 그 얼굴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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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그 무엇과 견줄 수 없는 변신의 천재다. 얼굴은 항상 타자를 향한다. 타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명령한다. 얼굴에서 발화되는 가장 강력한 주문은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우리는 어떤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얼어붙는다. 얼굴의 주문에 걸린 결과다.
사랑은 어떻게 오는가? 첫사랑은 기적처럼 다가온다. 사랑은 먼저 아름다운 얼굴에서 발화한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읽는 경전에서도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노래한다.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사랑은 아름다움을 무서움의 시작으로 겪게 만든다.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하는 얼굴을 어루만지며 애무한다.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그것을 이 세상에 없는 다른 무엇으로 빚는다.
우리는 타자를 얼굴로 기억한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란 이미 잊힌 얼굴, 박제된 얼굴이다. 다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얼굴이다. 우리는 얼굴을 품은 채 늙는다. 나는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다가 깜짝 놀란다. 거울에는 낯선 얼굴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슬픈 사실이지만, 나와 마주친 주름과 점과 흑자들로 뒤덮인 늙은 얼굴은 낯설었다.
노인의 얼굴이란 얼굴의 황폐가 아니라 존재의 쇠락이고, 변형이며, 돌이킬 수 없는 소멸의 징후다. 얼굴은 타자에게서 도망가고 어디론가 숨는다. 내게 사랑을 속삭이던 얼굴들은 다 사라졌다. 얼굴은 사랑의 명령을 망각한 채로 늙는다. 나는 사랑의 가능성을 탕진한 채로 여생을 살아갈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주 분별력을 잃는다. 사랑에 빠진 자는 이성의 마비와 함께 영혼을 앓는다. 사랑에 빠진 자가 얼이 나간 표정을 짓는 것, 얼굴이 우둔해 보이는 것이 그 증거다.
“내가 추악하고 우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도 우둔한 얼굴을 만들 줄 안다”(김수영, <풍뎅이>). 이성의 판단이 사라진 얼굴은 우둔해 보인다. 우둔함이란 분별의 부재가 아니라 분별력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둔함은 사랑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그 투기 행위에 매몰된 자의 몫이다. 얼굴은 그 벌거벗음으로 제 안의 비밀을 노출한다. 발가벗음은 수치를 낳는다. 얼굴에서 존재의 가난을 느끼고 부끄러움에 빠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 얼굴이여, 얼굴은 무로부터 솟아난 것, 우연히 내게로 온 것이다. 태초에 신이 우리의 얼굴을 빚었다. 이 피조물에 눈, 코, 입술, 이마, 볼이라고 부르는 것이 집중 배치된다. 얼굴은 감각적 형태를 가진 고유한 판이다. 이것은 평면이 아니다. 철학자 들뢰즈는 얼굴이 흰 벽과 검은 구멍으로 이뤄진 판이라고 말한다. 얼굴은 차이를 가진 고유한 표상이다.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하나의 얼굴을 빚는다. 얼굴의 빚어냄, 그게 인생의 일이다. 얼굴을 보면 그가 살아온 궤적, 자립의 흔적이 나타난다. 누구도 얼굴이 드러내는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얼굴은 살면서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하지만 제 정체성마저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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