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의 기아는 패배주의에 빠진 회사였다. 의사 결정의 핵심 포인트는 ‘형님이 하고 있는 일인지’와 ‘형님이 하기를 원하는지’였다. 1997년 외환위기로 부도가 난 이듬해 현대차에 인수된 ‘눈칫밥’ 먹는 동생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망한 회사가 신사업을 벌이는 건 언감생심. 판매든, 생산이든, 디자인이든 그저 ‘현대차 따라 하기’에 급급했다. “현대차는 어떻게 한답니까”를 당시 기아 임직원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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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간 기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몇몇 수치에 비밀이 담겨 있다. 외형 성장은 현대차와 기아가 크게 다를 바 없다. 2005년 16조원이었던 기아 매출은 지난해 100조원으로 6.3배 뛰었고, 같은 기간 현대차는 27조원에서 162조원으로 6.0배 늘었다. 같은 기간 판매량 성장폭도 기아(110만 대→308만 대·2.8배)와 현대차(168만 대→421만 대·2.7배) 모두 비슷했다.
차이점은 수익성이다. 2005년 740억원에 불과했던 기아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11조6079억원으로 무려 157배 뛰었다. 같은 기간 11배 불어난 현대차 영업이익 증가폭(1조3841억원→15조4000억원)을 압도한다. 지난해 기아차의 영업이익률(11.6%)은 전 세계 대중차 메이커 중 가장 높았다.
연구개발(R&D), 자재 구매 등의 효율성을 높여 업계 최고 수준의 원가 경쟁력을 확보한 게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텔루라이드, 스포티지, 셀토스 등 매력적인 디자인과 뛰어난 성능으로 비싼 가격에도 없어서 못 파는 ‘베스트셀러’를 줄줄이 내놓은 것도 수익성을 끌어올리는 데 한몫했다.
먼저 디자인. 정 회장은 ‘디자인 기아’를 모토로 내걸고 2006년 세계적인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해 K5, 쏘울 등을 내놨다. 기아의 디자인 정체성을 담아낸 ‘타이거노즈 그릴’과 한눈에도 기아 자동차란 걸 알 수 있는 ‘패밀리 룩’이 이때 탄생했다. 제품군도 차별화했다. 세단 비중이 높았던 현대차와 달리 텔루라이드, 스포티지, 쏘렌토, 카니발 등 레저용 차량(RV) 라인업을 대폭 강화했다.
정 회장은 한국만 바라봤던 기아의 눈을 해외로 돌렸다. 유럽과 북미를 해외 주력 시장으로 삼기로 하고, 슬로바키아와 미국 조지아에 각각 연 30만 대 이상 규모 공장을 지었다. 이 덕분에 기아는 유럽에서 현대차보다 더 많은 차를 팔고 있다. 미국 판매량도 현대차에 버금간다.
업계 관계자는 “정 회장이 주문한 ‘야성’이 깨어나지 않았다면 기아 임직원들이 차량 디자인을 싹 바꾸고 세단 대신 RV를 전면에 내세울 수 없었을 것”이라며 “잇따른 성공 체험으로 기아 임직원들에게 자신감이 붙은 만큼 현대차와의 차별화 전략에도 탄력이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아는 미래차 분야에서도 전기 승용차 및 수소차에 힘을 싣는 현대차와 달리 ‘목적 중심 차량’(PBV)을 주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기아는 2030년 연 PBV 30만 대 이상을 판매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PBV 시장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서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빈난새 기자 binther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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