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상장사들이 4조원어치의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밝혔다. 한 해 전과 비교해 네 배 이상 급증한 것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도입을 준비하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화답하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상장사 자사주 소각 ‘릴레이’
13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들어 이날까지 기아 삼성물산 SK이노베이션을 비롯한 상장사 25곳이 자사주 4조409억원어치를 소각한다고 발표했다. 작년 같은 기간 11곳이 발표한 자사주 소각 규모(8566억원)에 비해 371.8% 늘었다. SK이노베이션은 7936억원어치 자사주를 소각하기로 했다. 삼성물산도 자사주 1조원어치 이상 소각한다. KB금융지주 신한금융지주 하나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 등 4대 금융지주회사도 나란히 자사주 소각을 발표했다. 곳곳에서 신고가 경신
주가도 즉각 반응하고 있다. 이날 한미반도체 주가는 사상 최고가를 갈아치웠다. 지난 7일 이 회사가 보유한 자사주 200억원어치를 소각한다고 발표한 뒤 이날까지 32.8% 급등했다. 강력한 주주친화책으로 꼽히는 자사주 소각 카드를 꺼내 들자 주가가 뜀박질했다.기아는 이날 3.53% 오른 11만7200원에 마감했다. 지난달 25일 자사주 5000억원어치를 소각하겠다고 밝힌 뒤 26% 넘게 뛰었다. KB금융도 이날 3.11% 오른 6만9700원에 마감해 52주 신고가를 경신했다. 7일 자사주 3200억원어치를 소각한다고 발표한 이후 7.7% 상승했다.
지난달 31일 1조원 이상의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밝힌 삼성물산도 이날까지 13% 올랐다. SK텔레콤(2000억원어치 소각), 신한금융지주(1500억원), 현대모비스(1500억원), DL이앤씨(1083억원), HD현대인프라코어(560억원), KT(271억원) 등도 나란히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자사주 소각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 수와 자본이 줄어드는 만큼 주당순이익(EPS),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높이는 효과를 낸다. 자사주 매입과 배당보다 강력한 주주환원책으로 평가된다. 정부가 이달 말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할 예정인 가운데 기업들이 선제적으로 자사주 소각 카드를 꺼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주주환원 대책 못 미더운 개미
개인투자자들은 정부의 기업가치 향상 정책과 기업의 주주친화책에 아직 미덥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금융당국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을 공식화한 지난달 17일부터 이날까지 개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8조2011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이달 2일에는 2조4896억원어치를 순매도하면서 개인투자자 역대 최대 순매도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박스권 장세에 지친 개미들이 단기 시세차익을 노리고 집중 매도에 나섰다는 분석이 나온다.정부의 주주환원 정책 실효성에 거는 기대가 여전히 크지 않다는 시각도 있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중장기적으로 운영해 성과를 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금융당국이 내비쳐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부는 자사주 소각을 비롯한 주주친화책을 유도하기 위해 경영권 방어제도를 도입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자사주는 그동안 상장사 대주주가 지배력을 강화하는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됐다. 자사주를 백기사(우호 주주)에게 매각하면 의결권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자사주 소각은 자칫 경영권 약화로 이어질 수 있어 그동안 기업들이 꺼려왔다. 정부가 이를 보완하기 위해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을 비롯한 경영권 방어제도를 들여오면 자사주 소각이 더 늘어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익환/선한결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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