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진 그림 속에서 선율이 들리고 리듬이 느껴진다면 어떨까. 미국 뉴욕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1982년생 작가 윤협(사진)은 캔버스 위에서 작곡을 하며 관객에게 회화 그 이상의 경험을 선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윤협은 세계 여러 도시를 돌며 포착한 풍경과 그 속에 담긴 사람의 이야기를 오로지 ‘점’과 ‘선’으로만 그린다. 이 독특한 화풍 때문에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 그의 20년 작업 인생을 조망하는 전시 ‘녹턴 시티’가 서울 롯데뮤지엄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다. 2024년 롯데뮤지엄의 첫 번째 기획전이다.
2014년 그런 그를 처음 알아본 건 미국 유명 패션브랜드 ‘랙 앤 본’이었다. 우연히 그의 그림을 보고 “벽화를 그려달라”고 제안했다. 이 ‘길바닥 작업’으로 그는 혜성처럼 떠오르며 자신의 이름을 미술계에 각인시켰다. 이후 나이키, 바비브라운, 유니클로 등 글로벌 브랜드와 협업하며 국내외 예술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번 전시에서도 윤협을 지금의 작가로 만들어 준 협업작을 만날 수 있다.
롯데뮤지엄은 이번 전시를 위해 윤협의 회화뿐만 아니라 협업 제품, 조각까지 모두 모아 230여 점을 준비했다.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는 ‘도시’. 낮과 밤을 넘나들며 변하는 도시 속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그림에 표현했다. 그는 특정한 형체를 그리는 대신 점과 선으로만 그림을 구성한다.
수많은 선과 점 때문에 그림 안에서 음악적 선율을 느끼는 ‘청각적 경험’도 할 수 있다. 그의 성장 배경 때문에 가능한 얘기다. 그는 “어릴 적 어머니가 하던 음악학원에서 즉흥 연주를 배운 경험을 지금까지도 미술로 옮겨오고 있는 것”이라며 “모든 그림에 선과 점을 끊어 써서 율동감과 리듬감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시장 한곳에는 피아노곡인 녹턴이, 보드가 놓인 또 다른 전시장에는 힙합 음악이 흐른다.
2003년 그가 처음 작가가 돼 내놓은 작품도 전시장에 놓였다. 지금 선보이는 야경 작품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다. 1990년대 그가 서브컬처로 작업 세계를 구축할 때 만든 작업물들이다. 윤 작가가 21년 동안 작업 생활을 하며 찍은 사진을 모아 만든 비디오도 선보인다. 그는 “무려 작업 기간만 21년이 걸린 작품인데 이번에 첫선을 보인다”며 “20년 전의 지하철 풍경이나 재개발된 아파트 등 오늘날 사라져 버린 장소들을 볼 수 있다는 게 재밌을 것”이라고 감상 포인트를 소개했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초대형 파노라마 신작’이다. 뉴욕과 뉴저지를 잇는 조지 워싱턴 다리에서 바라본 야경을 담았다. 캔버스 가로 길이만 무려 16m로 롯데뮤지엄의 넓은 전시관 벽 하나를 모두 차지했다. 가장 왼쪽의 할렘부터 월스트리트를 거쳐 오른쪽 뉴저지에 이르기까지 뉴욕의 여러 모습을 하나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다. 윤협은 “파리에서 본 모네의 ‘수련’ 연작에 감명받아 작업한 그림”이라며 “모네의 작품에서 연꽃이 수면에 비치는 것과 같이 치열한 뉴욕의 도시가 아름답게 강에 비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윤협의 개인전은 ‘한국 작가의 전시’라는 점에서 더욱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간 롯데뮤지엄이 JR, 오스틴 리 등 외국 작가를 주로 소개해 온 미술관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롯데뮤지엄 관계자는 “이번 윤협 개인전을 계기로 국내 작가들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라며 “이미 조명받고 있는 원로 작가보다는 새롭게 떠오르는 젊은 작가들을 발굴해 해외에 알리고 지원하는 역할을 하려 한다”고 밝혔다.
전시장을 나가는 마지막 길목엔 윤협의 야경 그림으로 만든 영상이 전시관의 세 면을 모두 감싸며 관객에게 인사를 건넨다. 롯데뮤지엄이 그의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것이다. 윤협 또한 이 영상을 전시 개막 직전에 처음 관람했다. 그는 “전시를 통해 ‘살아있는 그림’이라는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라며 당시의 감동을 그대로 전했다. 전시는 오는 5월 26일까지.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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