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느 저녁 귀가하다가 여행에의 욕구가 푸른 싹처럼 내면에서 돋아난 걸 깨달았다. 이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온갖 여행들로 직조되는 게 인생살이 아니던가! 여행과 마찬가지로 삶은 미지에로의 투신이다. 이 느닷없는 여행 욕구는 주변을 겉도는 느낌, 모호한 기분들, 허전함과 지루함과 쓸쓸함, 아무도 아닌 자로 사는 눅진한 권태에서 비롯되었을 테다.
양치질을 하다가 치약의 계면활성제가 구역질을 일으키고, 구두끈을 매다가 사는 게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하고 중얼거린다. 입춘 날 아침, 무심히 구름이 떠가는 하늘을 보다가 올해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리라 결심한다. 여행이란 먼 곳에서의 낯선 부름에 응답하는 일이다. 그 여정은 나에게서 출발해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다. 하지만 여행이 나를 떠나 나에게로 돌아오는 일이라는 걸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다. 여행의 시작과 끝 중간에 여정이 자리한다. 마치 탄생과 죽음 사이에 삶이 발포성 음료 거품처럼 바글거리듯이.
나는 가끔 양말을 뒤집어 신고 지갑을 잊은 채 외출에 나선다. 나는 치과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는 것이나 관공서에서 오는 전화를 아주 싫어한다. 나는 종종 먼 정거장에 우두커니 서 있고 싶다. 나는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비염 증세로 코가 막히고, 자다가 절박뇨 때문에 두어 번 깨어난다. 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미치도록 좋아하지만 피아노는 연주하지 못한다. 나는 가지 않은 도시의 경찰서에서 발부한 주차 위반 범칙금 고지서를 받은 적이 있다. 착오로 밝혀져 범칙금을 내지 않았지만 왜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서울의 복잡한 지하도에서 길을 잃어 헤맨 적이 있고, 외국 여행 중 입국 심사대에 서면 약간의 불안과 요의를 느낀다.
나는 누구인가? 누구나 외부의 영향 없이 온전한 자기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상호 영향을 받는 사회와 조직이 만드는 네트워크 속에서 산다. 네트워크들은 개인에게 책임과 의무를 씌운다. 나는 네트워크에 소속되기보다는 독립적 자아로 사는 걸 더 좋아한다. 그런 까닭에 매일 아침 8시면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서지 않는 걸 다행스럽게 여긴다. 나는 자율적으로 시간을 쓰는 사람이고, 그곳이 어디든 노트북을 켜고 앉는 자리가 내 일터다.
나는 트라피스트 교단이나 좌익 사회주의 혁명당원도, 이슬람 근본주의 정파 소속도 아니다. 나는 어떤 정당 활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온건하고 평범한 사람이다. 누군가는 나를 보행자, 애묘인, 독서광, 작가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밖의 나는 아파트 입주민, 헬스클럽 회원, 넷플릭스 가입자, 종합소득세 과세 대상자, 2종 운전면허 소지자, 실손 보험 가입자, 국민건강보험 가입자라는 신분으로 살아간다.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다.
나는 새벽에 고양이들과 함께 깨어난다. 고양이들이 모래에 묻은 똥과 오줌을 치우고, 냉장고에서 사과 한 알을 꺼내 먹는다. 나는 건강한 편이지만 건강을 염려한다.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남극의 빙하가 녹는 것과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오르는 물가와 대도시의 교통난, 악의 범람, 핵전쟁의 위기, 팽창하는 우주의 미래를 염려한다.
당신은 폭우로부터 가뭄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 이 엉뚱한 질문은 기원전 535년께 소아시아의 서안 에페소스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철학자가 던진 것이다. 그는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탐구한 철학자다. 좋은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집안의 재력으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산속에 자발적으로 은둔한다. 혼자 살며 풀과 나뭇잎을 먹으며 살았던 탓에 수종이라는 질병을 얻었다. 그는 의사들에게 이처럼 수수께끼 같은 물음을 던진다. 그건 수종 치료법과 관련된 질문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진의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오, 양초처럼 불타올라라! 그것은 무언가를 도모하며 산다는 뜻이다. 나는 생명이 품은 가능성을 탕진한 채 먼지가 되어 흩어지리라! 지구가 자전하며 궤도를 도는 동안 내 생명의 시간은 째깍째깍 줄어든다. 와인잔의 적포도주가 차츰 줄 듯 내 인생의 쇠락은 명확하다. 어차피 사람은 제 생명을 다 쓴 뒤에는 이 세상과 작별한다. 나는 봄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모란과 작약이 피는 걸 볼 수 있을까를 혼자 가만히 짚어본다. 그건 가슴 저미도록 슬프고 아름다운 속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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