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을 떠날 땐 3년 만에 한국에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렇게 시작된 재즈 인생이 어느새 30년이나 됐네요. 돌아보면 한시도 음악을 하면서 지루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가 더 기대됩니다. 아직도 무대 위에서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게 너무나 많거든요. 이젠 제 인생 목표를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할 때마다 새로운 ‘진짜 재즈 음악’을 아주 오랫동안 하고 싶어요.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거예요.”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 나긋한 말투로 수줍게 인사를 건넨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55)은 “마이크도 없고, 피아노도 없지만 짧게라도 직접 제 목소리로 노래를 들려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작품은 니나 시몬의 ‘필링 굿’(Feeling Good). 음(音)은 11개가 전부고, 크기도 한 뼘에 불과한 작은 악기 칼림바를 두 손에 올린 채 두 눈을 지그시 감은 나윤선은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까지 모두 집어삼킬 만큼 파워풀한 성량을 선보이다가도 금세 음량을 줄여 신비로운 음색을 불러내면서 몽환적인 작품 세계를 생생히 표현해냈다.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세계적 재즈 디바 나윤선이 한국 청중과 만난다. 다음 달 17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다. 이번 공연에서 나윤선은 지난 1월 유럽에서 발표한 정규 12집 ‘엘르’(Elles)의 레퍼토리를 라이브로 들려준다. 프랑스어로 ‘그녀들’이란 뜻을 지니는 이 앨범엔 타이틀곡인 니나 시몬의 ‘필링 굿’과 함께 로버타 플랙의 ‘킬링 미 소프틀리 위드 히스 송'(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 사라 본의 ‘마이 퍼니 밸런타인’(My funny Valentine) 등 10명의 여성 가수 작품이 담겼다.
“제게 엄청난 영향을 준 음악가들이에요. 이들 노래에선 딱 두 개 음만 들어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바로 알 수 있잖아요. 그렇게까진 욕심 같고, 누군가가 1분 만에라도 제 목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이번 음반은 나윤선에게 더욱 각별하다. 레드 제플린, 퀸, 지미 헨드릭스 등과 작업한 전설적인 엔지니어 밥 루드비히가 은퇴 선언 직후(지난해 8월)임에도 마스터링을 맡은 귀중한 앨범이라서다. 그는 “(나윤선의 노래는) 충격적으로 좋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의해 이렇게 감동받아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는 격찬을 남기기도 했다.
1994년 학전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여주인공으로 데뷔한 나윤선은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유명한 음악가다. 2001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그에겐 외신들의 찬사가 끊이지 않는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 목소리”(프랑스 르몽드), “재즈 보컬의 전설을 이어갈 운명을 지닌 유일무이한 아티스트”(프랑스 뗄레라마), “재즈 가창의 세계를 통틀어 가히 독보적인 정교함과 섬세함”(독일 쥐트도이체차이퉁) 등이 모두 그에 대한 평이다. 나윤선은 한국 재즈 보컬리스트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문화예술공로 훈장인 슈발리에(2009년)와 오피시에(2019년)를 모두 거머쥐기도 했다.
이 정도 성과면 안주할 법도 한데, 그는 한시도 도전을 멈출 수 없다고 했다. “아무리 길어도 3년을 넘기지 않고 꾸준히 앨범을 내려고 해요. 매일 좋은 영감이 떠오른다기보단, 끊임없이 좋은 공연을 만들고 싶어 스스로 내는 숙제 같은 거예요. 무대에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려면 레퍼토리는 멈추지 않고 개발되어야 하니까요. 소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어떻게 하면 목소리란 악기를 더 다양하게 쓸 수 있을까’란 고민에 빠져요. 실제 악기를 흉내 내보는 연습도 하고요. 새로운 소리와 음악에 대한 열망은 아마 30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하하.”
김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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