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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식, 내 가족, 내 나라가 잘되기를. 다음 생은 이번 생보다 행복하기를. 언젠가는 극락왕생할 수 있기를.
이름 없는 한·중·일 여성들의 이 같은 강렬한 염원이 가득 담긴 걸작들이 지금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 나와 있다. 동아시아 여성들의 삶을 불교미술을 통해 조망한 기획전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 열리고 있다. 전통적으로 한·중·일에서 여성은 불교미술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이승혜 리움미술관 큐레이터는 “불교미술 작품들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않은 과거 여성들의 삶을 돌아보는 훌륭한 창”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시아 불교미술을 통해 여성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전시 콘셉트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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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주제만큼이나 주목할 만한 건 ‘블록버스터급’ 규모와 출품작 수준이다. 하나하나가 각국이 소장한 주요 문화재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불교중앙박물관 등 국내에서 9곳의 국보 1건과 보물 10건 등 40건,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독일 쾰른동아시아미술관 등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서는 유물 52건을 빌려왔다. 92건 중 절반 이상인 47건은 한국에서 처음 전시되는 작품. 올해 열리는 고미술 전시 중 단연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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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일본의 개인소장자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문화재청은 42억원을 지불하고 불상을 환수하려 했다. 하지만 소유자가 150억원을 제시해 협상이 결렬됐다. 한국 관객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나마 이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됐다. 입꼬리를 올린 ‘백제의 미소’, 흘러내린 옷 주름과 목걸이의 꽃무늬 장식 등 섬세한 세부 묘사, 날렵한 허리와 살짝 비튼 골반의 우아한 곡선미는 이 작품이 왜 백제 미술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한다.
일본 혼가쿠지가 소장 중인 15세기 조선 불화 ‘석가 탄생도’와 쾰른동아시아미술관 소장 ‘석가 출가도’의 만남도 주목할 만하다. 원래 한 작품이었던 이 그림은 세월이 흐르면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찢어졌고, 한반도를 떠나 흩어졌다. 기구한 운명을 겪은 두 작품이 고국에서 재회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안타깝게도 석가 탄생도는 5월 5일까지 전시된 후 일본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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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빌려온 ‘수월관음보살도’도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이후 6년 만에 한국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수월관음도는 불화의 한 종류로, 관세음보살의 모습이 물에 비친 달처럼 고요하고 아름답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작품은 비단 바탕에 금과 천연 안료로 그렸다. 고려불화의 특성상 보존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천 무늬가 보일 듯 말 듯 투명하게 표현된 베일 등 섬세한 표현에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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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고 불교가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여성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이 생겨났지만, 남존여비 사상은 여전했다. ‘감지금니 묘법연화경’의 제작을 의뢰한 고려 여인 김씨가 남긴 글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저는 이전 겁의 불행으로 여자의 몸을 받았으니…(중략) 참으로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이로 인하여 은 글자로 쓴 화엄경 1부와 금 글자로 쓴 법화경 1부를 만드는 정성스런 소원을 간절히 내어, 이제 일을 끝마치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와 종교가 요구하는 틀 속에서도 여성들은 끈질기게 공덕을 쌓아 주변 사람들의 안녕을 빌었고, 더 높은 존재가 되고자 했다. 문정왕후(1501~1565)가 발원한 ‘영산회도’와 ‘석가 여래삼존도’, ‘약사여래삼존도’ 등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을 내세운 조선에서 여성들의 후원이 불교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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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으로 여겨졌던 관음보살이 여성으로 인식되는 과정을 담은 관음보살 조각품 여럿, 부정하다고 여겨진 여성의 머리카락으로 부처를 표현한 일본의 중요문화재 ‘자수 아미타여래삼존내영도’도 인상적이다. 이 큐레이터는 “여성은 부처가 될 수 없는 몸이라는 인식을 부정하기 위해 일부러 머리카락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라는 전시 제목은 이렇게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살고자 했던 여성들의 흔적과 내면을 조명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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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에 관심 없는 관람객이라도 시간을 내 보러 갈 만한 수준 높은 전시다. 그런 점에서 호암미술관의 약점으로 꼽혀온 교통 문제가 해결된 건 미술 애호가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미술관은 전시 기간 중 매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두 차례씩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 사이를 운행하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영한다. 현장 탑승도 가능하지만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는 게 좋다. 주차 공간도 추가로 500여 대 규모를 늘렸다.
전시장 조명이 어둡다. 고려불화 등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작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지만, 어두운 공간에서 보는 불교미술 특유의 금빛 광채가 신비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호암미술관이 자랑하는 미술관 부속 전통 정원 ‘희원(熙園)’에 피기 시작한 꽃과 함께 즐기면 말 그대로 금상첨화다.전시는 6월 16일까지.
용인=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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