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는 곧 폭력의 역사라는 말은 조금도 새롭지 않다. 전쟁, 약탈, 살인, 고문 같은 폭력이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폭력은 한마디로 짓밟음, 목조르기, 사악함의 무분별한 과시이고, 아울러 타자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일체의 행위를 포괄한다. 타자를 짓누르고 침식하며 영혼을 일그러뜨리는 폭력은 항상 반생명적이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극악한 폭력은 홀로코스트일 것이다. 홀로코스트가 증명하듯 폭력은 증오를 먹고 자라난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잔인함은 사라질 기미가 안 보이고, 세상은 더 잔혹한 폭력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핑커가 제시하는 거시적 지표들은 위상학적으로 폭력의 감소를 가리킬지 모르지만 우리가 폭행, 납치, 살해, 성폭행, 온라인에서의 성 착취, 조리돌림 등등의 범죄가 줄었다는 실감을 갖기는 어렵다. 오늘도 폭력 범죄는 도처에서 성별과 연령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일어난다. 이렇듯 불특정 다수가 범죄의 대상이 된다는 건 우리가 안전 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는 유력한 증거다.
자, 우리 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자. 한 여성이 오피스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낯선 남자의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30대 가해자인 남성은 돌려차기로 20대 여성의 뒷머리를 가격하고, 바닥에 널브러진 여성을 둘러메고 외딴곳으로 가서 성폭행을 저질렀다. 가해자의 잔혹하고 끔찍한 만행으로 여성 피해자는 뇌출혈과 해리성 기억상실 증상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이것이 2022년 5월 22일 새벽 5시께 부산에서 있었던 폭행 사건의 전말이다. 가해자가 저지른 무차별 폭력의 잔혹성도 놀랍지만 두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이라는 점이 우리를 더욱 경악하게 한다.
폭력은 타자로부터 온다. 타자의 낯섦은 우린 안의 두려움을 자극한다. 그런 연유에서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사르트르)라는 선언이 나왔을 테다. 타자는 비위생적인 존재이고 질병을 옮기는 잠재적 보균자라는 의심이나, 내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을 지닌 위험 요소라는 점에서 우리 안의 확증 편향을 증폭시킨다.
우리는 ‘나르시시스적 내면성’이라는 블랙홀에 갇힌 채 타자를 밀어낸다. 다른 한편으로 철학자 한병철은 “타자의 다름을 보는 능력이 예의”라고 말한다. 타자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는 예의가 없는 사회라 할 수 있다.
“내가 타자의 다름을, 타자의 그러함(So-Sein)을 그대로 용인하고 긍정하는 그런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다르게 구성하는 작업, 파괴적인 면역 저항을 촉발하지 않도록 타자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를 우의와 관용의 관계로 바꾸는 것이다. “우의는 타자를 그저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태도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관여의 태도로 타자의 그러함과 관계 맺는 것을 의미한다.” (한병철, <폭력의 위상학>)
폭력이 득세하는 사회에서 피해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숨을 죽인다. 관용과 우의가 사라진 자리에는 후안무치한 괴물들이 뱉는 막말이 번성한다. 누가 괴물을 이웃으로 두고 싶을까?
우리는 선량한 이웃과 평화로운 사회에서 살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한뜻으로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막말의 정치를 끝내고 우의와 관용의 정치를 만드는 데 작은 힘을 보태야 한다. 누가 우리의 귀에 증오와 혐오의 말을 쏟아내는가? 투표장에 나가 유권자의 권리로 상생을 배제하고 험한 말과 폭력에 기대는 자들을 심판해야 한다. 또한 ‘싸울게요, 아직 안 죽었으니까요’라는 피해자 여성의 외침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행동해야 한다. 그게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드는 첫걸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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