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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기업 루미넌스는 최근 사람이 전혀 개입하지 않고 계약서 검토부터 협상까지 한 번에 끝내는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을 내놨다. 협상 전문 AI가 계약서 내용을 검토한 후 상대 AI와 계약서를 주고받는다. 문제 조항이 있다면 빨간색으로 긋고, 더 적합한 것으로 바꾼다. 인간 변호사는 최종 서명 단계에만 참여한다.
보수적이던 법률 분야에 AI의 영향력이 빠르게 커지는 모습이다. 법조계에선 기존 로펌 변호사가 맡던 업무 중 상당 부분을 AI가 대체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변호사 돕는 AI 기술
리걸테크업계에 따르면 미국의 한 로펌은 리걸테크업체 키라시스템스의 서비스를 도입한 후 변호사 업무량을 평균 48% 줄였다. 변호사가 검토해야 할 계약서상 불공정 조항을 AI가 분석해 시각화한 자료를 받은 효과였다.한국 로펌들도 이미 문서 분류와 외국어 번역 등 단순 작업을 AI에 맡기고 있다. 법무법인 세종은 의견서, 소장 등 법률 문서를 나누는 데 AI를 활용한다. 율촌은 영상에서 텍스트를 자동으로 뽑아내 주는 AI 시스템을 도입했다. 변호사 시장을 겨냥한 국내 스타트업 서비스도 많다. AI 판결문 검색 서비스를 운영하는 엘박스는 국내 변호사 절반이 이용한다. 인텔리콘연구소의 문서 분석 솔루션인 도큐브레인도 여러 로펌이 활용하는 서비스다.
AI 바람이 법률 분야에서 유독 뜨거운 것은 문서 작업이 많은 업무 특성 때문이다. 업계에선 법률산업이 AI 기술의 테스트베드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2027년 전망되는 법률 AI 시장 규모는 465억달러(약 62조원). 골드만삭스도 최근 보고서에서 법률산업 전체 업무의 44%가 자동화될 것으로 분석했다. AI 발전이 법률산업을 혁신할 것이란 기대도 나오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소송 접근성을 높이고, 법률 연구를 혁신하며, 소송을 빠르고 저렴하게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존 로버츠 미국 대법원장)이라는 것이다.
다만 AI 변호사에 대한 논란은 늘 따라붙는다. 얼마 전엔 프랑스 리옹 출신 한 기업가가 개발한 아이아보카라는 앱이 이슈가 됐다. ‘변호사가 1년 걸릴 일을 1분이면 해결한다’는 홍보 문구가 문제였다. 연 69유로에 법률 조언을 제공한다는 AI 변호사의 등장에 프랑스 법조계가 뒤집혔다. 개발사는 아보카(변호사)를 빼고 ‘인텔리전스 리걸’로 앱 이름을 변경하기로 했다.
○“할루시네이션 해소는 과제”
법률 문서의 요약과 정리에 필요한 시간을 AI가 줄여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챗GPT와 구글 바드는 한국 법률 데이터를 따로 학습하지 않고도 입력한 지시어에 따라 고소장 초안을 작성할 수 있다.보수적이던 법원과 경찰 등도 AI 활용에 전향적이다. 법원행정처는 재판 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재판 지원 도우미AI’(가칭)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경찰청 역시 시민들이 AI로 쉽게 고소장을 작성할 수 있도록 AI 시스템 도입을 검토 중이다.
다만 AI의 ‘할루시네이션’(환각·그럴싸한 거짓말) 문제는 풀어야 할 과제다. 업계는 할루시네이션 해결과 기술 고도화를 위해 한국 법원이 판결문 데이터를 공개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법률과 판례, 논문을 기반으로 작성한 엄청난 양의 판결문이 ‘AI 학습의 보고’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공개되는 판결문은 극히 일부다. 엄격한 익명 처리 때문에 마치 암호문 같다.
민명기 로앤굿 대표는 “극소수 판례를 제외하고는 판결문 하나당 1000원을 내고 사야 하는 상황”이라며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리걸 AI 개발이 쉽지 않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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