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여행을 꽤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몇 년 전까지 치앙마이는 그저 낯선 네 글자였다.
나라 이름인지, 도시 이름인지조차 잠시 생각하게 하는 태국 북쪽의 어떤 도시. 치앙마이는 ‘한 달 살기’라는 수식어를 달고 우리에게 왔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때. 낮은 생활비로 불편함 없이 느긋하게, 진정한 ‘슬로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로맨틱한 장소로 말이다. 그때 결심했다. 언젠가 지칠 대로 지쳐 도무지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는 그런 때가 오면 꼭 한번 떠나보리라고. ‘그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하필이면 아무도 추천하지 않는 3월의 마지막 주, 별 계획도 없이 치앙마이로 떠났다. 낮 기온 최고 39도, 공기 질조차 최악이라는 그 시즌에 말이다.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북쪽으로 700㎞. 치앙마이로 떠나기 전 잠시 검색해본 결과는 이랬다. 방콕에 이은 태국 제2의 도시, 원시와 문명이 공존하는 도시, 태국 북방의 장미, 황금의 삼각지대,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산 위의 사원 도이수텝, 겨울 골프의 성지….
10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여행 비수기에 찾은 덕(?)에 덥고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자연으로 향했다. 태국에서 가장 높은 산 도이 인타논에서의 트레킹, 치앙마이 북부 실란나 국립공원에서의 정글 바이크는 치앙마이의 옛 왕국 이름 ‘란나(Lanna)’가 왜 ‘백만 개의 논’이라는 뜻을 지녔는지를 실감하게 했다. 기계와 문명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과거의 것들을 그저 과거 방식으로 이어가는 그들의 삶을 잠시나마 들여다보며 소란한 세상에서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가늠할 수 있었다.
치앙마이 여행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하나같이 오랜 전쟁으로 인한 아픈 과거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여러 국적의 사람이 한데 모여 살면서도 사소한 분쟁 하나 없는, 이상하리만치 너그러운 그들에게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국적과 과거를 가진 사람이든 어떻습니까. 치앙마이에 오면 모두 치앙마이 사람이 되는걸요.”
원시 자연 품은 역사의 중심 치앙마이
태국 최고봉 '도이인타논 국립공원'
대자연·원주민 만나는 트레킹 명소
아웃도어 액티비티의 성지, 치앙마이
울퉁불퉁 산악 따라 짜릿한 바이크
야생 코끼리와 샤워하는 이색 체험도
슬로 라이프와 힐링 천국. 치앙마이에 관한 흔한 생각이다. 그래서 전 세계 배낭여행객이 몰려 ‘한 달 살기’ 도시로, 겨울 골퍼들이 즐겨 찾는 여행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이 말도 맞다. 길 하나에 수없이 널린 타이마사지숍과 비건 레스토랑, 수준 높은 카페와 호텔, 몇 천원에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 그리고 1년 내내 주말마다 열리는 야시장과 도심 주변 골프 코스까지 있으니까.
치앙마이를 찾는 유럽과 미국 여행객의 시선은 좀 다르다. ‘아웃도어와 대자연의 성지’라서다. 치앙마이 구도심에서 차로 한 시간 안팎이면 놀라운 자연경관이 펼쳐진다. 태국에서 가장 높은 해발 2565m의 남서쪽 도이인타논 국립공원은 물론 북쪽 실란나·탄째 국립공원 등이 열대우림과 고지대의 원시 식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타패 문을 중심으로 사원이 빼곡한 구도심과 신도심 님만해민만 봤다면, 치앙마이를 반쯤 본 것이나 다름없다.
700년 역사의 태국 북부 중심지
치앙마이는 700년의 역사를 지닌 태국 고대 역사의 중심지이자 논과 밭과 울창한 산림, 숨막히는 절벽과 폭포, 코끼리와 사원으로 둘러싸인 도시다. ‘태국 제2의 도시’라고 불리지만, 면적으로만 따지면 다섯 번째로 큰 도시다. 그런데도 ‘제2의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치앙마이는 90년 전까지만 해도 태국이 아닌, 다른 나라였다. ‘란나(Lanna)’라 불리는 700년 역사의 독립된 국가였다. 티베트와 가까운 중국 윈난성 지역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만든 나라의 수도가 치앙마이였다. 그래서 민족도 다르고 언어도 달랐다.
태국 수코타이, 아유타야 왕조와 미얀마, 라오스의 경계에서 태국 북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란나 왕국. 란나라는 이름도 ‘100만 개의 논’이란 뜻이다. 란나 왕국은 태국 중원을 차지한 수코타이와의 전쟁을 계속 하다가 1556년 버마에 의해 점령됐다. 약 200년간 버마(지금의 미얀마)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반버마항쟁을 벌여 몰아낸 뒤 1932년 태국에 병합됐다.
영화 ‘아바타’의 모티브가 된 도이 인타논
화려한 치앙마이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어 ‘태국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도이인타논 국립공원을 찾았다. 해발 고도가 높아 아무리 더운 날에도 선선한 바람을 마주할 수 있다. 도이인타논은 ‘인타논 산’이란 뜻인데, 란나 왕국의 마지막 왕 인타위차야논 왕이 스스로 이 산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195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 산엔 360종이 넘는 새, 긴팔원숭이와 표범 등이 살고 있다. 인타논 왕은 이 산에 자신의 이름을 하사하고 죽어서도 란나의 땅을 돌보겠노라고 선언해 태국 최고봉인 산의 정상에 자신의 무덤을 두게 했다. 이 산에선 베치라탄 폭포와 시리탄 폭포가 가장 아름답고 장엄하기로 유명하다. 60~80m 높이로, 폭포 바닥에 돌과 모래층이 신비롭다. 폭포 가까이에 다가가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많아 5~9월에는 시원한 물을 맞으며 걸을 수 있다.
산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고 여러 군데 트레킹 코스가 나뉘어 있는데, 이 중 ‘잉카 트레일’은 영화 ‘아바타’의 모티브가 될 정도로 환상적인 풍경을 갖고 있다. 도이인타논 서쪽과 남쪽엔 란나 왕국 이전부터 터를 잡고 살았던 부족 카렌족이 산다. 산책로 입구에서 마을 주민이 나와 산행 가이드를 하는데, 흰옷을 입었다면 미혼 여성, 화려한 자줏빛 옷을 입었다면 기혼 여성이다. 한 시간가량 트레킹하다 보면 커피나무, 계피나무, 레몬그라스 등의 나무와 울창한 대나무숲은 물론 시원한 계곡들도 여러 차례 마주한다. 논농사로 자급자족하는 이들이 전통 방식으로 가꾼 드넓은 논과 자연의 재료로만 지은 집, 화훼 단지와 커피 농장까지 만날 수 있다.
바이크와 캠핑 성지…코끼리와 목욕을
치앙마이는 바이크와 캠핑을 즐기는 이들이 즐겨 찾는다. 일정에 따라 반나절, 하루, 2박3일 캠핑 등의 프로그램을 도심의 여러 회사나 호텔들이 직접 운영한다. 하루는 10년 전 아웃도어 코스를 10명의 레인저와 함께 발굴한 ‘트레일헤드’를 따라 실란나 국립공원 인근 산악 자전거 투어에 나섰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 ‘부아텅폭포’에 이르는 경로였는데, 전통 가옥은 물론 흰개미의 알을 채집하는 농부들, 방목 중인 소를 여러 번 마주쳤다. 울퉁불퉁한 정글의 산악 지형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은 자전거 중급자 이상에게 추천하는데, 자전거를 실을 수 있는 차량과 레인저가 모든 일정을 함께하기 때문에 위험을 느끼진 않았다. 부아텅폭포는 석회질이 풍부한 폭포수가 수백m 굽이쳐 흐르는 곳으로 걸어서 내려간 뒤 맨발로 폭포의 시작점까지 오를 수 있다. 다소 미끄러운 구간도 있지만 밧줄을 잡고 오를 수 있다.
코끼리 보호구역은 치앙마이의 오랜 자랑이기도 하다. 도심 주변 한 시간 이내 7~8곳이 존재한다. 과거와 달리 코끼리로 쇼를 하거나 코끼리를 타는 등의 동물 학대 문화는 거의 사라졌다. 은퇴한 코끼리, 야생에서 사라져가는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함께 먹이를 주거나 목욕시키는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태국 여행 전 이것 꼭 기억하자
요즘 치앙마이를 찾는 사람들이 놀라는 건 길거리 곳곳에 즐비한 대마 가게다. 모던한 카페나 바처럼 생겨 오인하기 쉽다. 2022년 6월 의료용 대마가 합법화된 이후 방콕과 치앙마이는 물론 태국 전역에 최소 6000개 이상의 가게가 생겨났다. 이전까지 대마초 소지죄로 5년, 제조죄로 최대 징역 15년을 선고하던 태국은 ‘농촌 소득 증가와 관광업 증진’을 명분으로 대마를 합법화했다. 갑작스러운 법 통과에 전역에서 무질서한 대마 유통과 판매가 이뤄지고 있다. 대마 한 개비(0.5g) 가격이 1만원을 넘어 현지 한 끼 식사 가격의 네 배가 넘으니 청년들이 무분별하게 유통에 뛰어들고, 병원에 실려오는 사람도 많아 정부는 이 법을 다시 철회할지 고심하고 있다고.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치앙마이 인근 부족들은 ‘골든 트라이앵글’이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대마를 재배해 전 세계 아편의 주요 공급원이 된 역사가 있다. 모든 구매자의 여권 정보 등을 의무 기록해야 하지만, 실제 지켜지지 않는 곳이 많다. 음료나 음식에도 대마 성분이 들어 있을 수 있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당분간 주의해야 한다.
태국 거장이 설계한 호텔 라야 헤리티지
테라스선 유유히 흐르는 '핑강' 보이고
인테리어·식기 등 지역 장인들 손 거쳐
외국 여행객 위한 수십가지 퓨전요리
도자기·섬유 등 특별한 공예 체험까지
낯선 도시로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누군가 다정하게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치앙마이에서 그 룰이 깨졌다. ‘3월 태국 북부 여행은 취소하세요’라는 여행 사이트들의 공통된 경고에도 굳이 모험을 택한 용감한 자에게 찾아온 행운이었던 걸까. 불볕더위가 기승이라는 치앙마이로 떠나는 길에 고요하게 머물 수 있는 숙소를 검색해 ‘라야 헤리티지’라는 곳을 예약했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치앙마이 공항에서 30분, 도심에서 20분 거리의 이 호텔은 들어서자마자 백색의 면으로 편안한 옷을 지어 입은 직원들이 맑은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며 환영했다. 거대한 나무기둥과 백색의 건축물 사이 움푹 자리 잡은 수백 년 수령의 나무, 그보다 더 오래됐을 법한 목재 공예품들과 그 뒤로 펼쳐진 핑강. 머무는 내내 공간은 오래 살던 집처럼, 호텔 스태프들은 오래 알던 친구처럼 느껴졌다.
여행이 끝나자, 라야 헤리티지에서 머물렀던 하루하루가 첫인상의 감동을 몇 배로 더 키웠다. 이기심이 발동했다. 정말 맛있는 식당, 정말 좋은 호텔을 발견하면 누구나 ‘나만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까. 여행기를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망설임으로 가득하다. 다만, 이 호텔이 가진 스토리와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란나 왕조의 위대한 유산
‘라야 헤리티지’는 우리말로 ‘위대한 유산’이라는 뜻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옛 도심의 유적, 치앙마이 지역의 감성으로 꾸몄다. 방에 들어서면 호텔을 소개하는 흑백 영상이 나오는데, 이 지역의 장인들이다. 호텔의 시설들을 소개하지 않고, 도예가와 목공예가들을 내세운 데는 이유가 있다. 객실이 단 33개인 이 호텔의 모든 인테리어와 식기들까지 지역 장인들의 손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여정에 주말이 포함된다면, 이 장인들의 스튜디오를 방문할 기회도 열려 있다.)
모든 객실이 테라스를 갖추고 있고, 이 테라스에선 유유히 흐르는 핑강이 내다보인다. 치앙마이를 관통하는 핑강은 13~18세기 치앙마이의 란나 왕국을 먹여 살린 젖줄과 같았다. 이 강이 있어 비옥한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이 강이 있어 어부들도 부를 누렸다.
라야 헤리티지는 세계적인 호텔그룹 LHW(Leading Hotels of the World)가 운영하는데, 설계와 건축은 태국의 유명 건축가 분러트 헴비지트라판 분디자인 대표가 맡았다. 치앙마이가 독립 국가였던 13~18세기, 란나 왕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담아내기 위해 도심의 유적과 전통 건축 양식, 지역 예술가들을 끌어왔다고.
전통을 잇고 공유하는 사람들
라야 헤리티지는 단지 공간에만 전통을 입히지 않았다. 숙박의 경험을 특별하게 하는 것은 직원들이 투숙객들에게 매일 다른 콘텐츠로 운영하는 체험 프로그램과 미식의 공간들. 매일 오후 3시마다 로비 마당에 스태프들과 둘러앉아 ‘전통 공예’를 체험할 수 있다. 전 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목화 재배지인 치앙마이는 섬유 공예 분야에선 따라올 곳이 별로 없다. 색색의 실로 천을 짜고, 찰흙으로 도자기를 만들고, 대나무 속살로 모든 불운을 막아준다는 독수리 눈을 만들고 나면 호텔을 채우는 수공예 인테리어 요소들이 다르게 다가온다.
하루 두 번의 하우스키핑 중 저녁 시간이 되면 손안에 들어오는 크기의 나무 공예품들이 방 한쪽에 놓였다. 수백 년 전 이 지역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를 오래 살 수 있도록 보관하는 대나무함 콩(Khong), 물고기를 가둬두던 어망 숨(Soom) 등이 지역 명언과 이야기를 담은엽서, 간단한 먹을거리와 함께 찾아왔다.
33개의 방, 오직 그들만을 위한 건강식
새소리와 꽃향기에 매일 아침 눈이 떠지는 도시인의 호사는 레스토랑 ‘쿠 카오(Khu Khao)’에서 이어진다. 오직 이 지역에서 나는 농수산물로 조식부터 야식까지 수십 가지의 퓨전 요리가 펼쳐진다. 호텔 옆 강가에는 호텔 직원들이 레몬그라스, 고추, 각종 향신료의 재료 등을 직접 재배하는 유기농 텃밭이 펼쳐져 있다. 설탕을 쓰지 않고도 스테피아 잎과 판단 잎만으로 단맛을 내고, 유기농 재료를 써서 태국 북부 전통 음식부터 세계 각국의 정찬을 내놓는데, 최소 5박 이상을 하며 아침과 저녁을 모두 해결해야 맛볼 수 있을 정도다.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이어지는 조식은 제한 없이 모든 메뉴를 주문할 수 있어 느긋하게 즐기기를 권한다.
태국 동부 출신으로 인도에서 다년간 요리했던 수석셰프 솜욧 포꽁은 “치앙마이 전통 음식은 구도심에서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국적의 여행자들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더 건강하고 복합적인 맛을 찾으려 했다”고. 오후의 차를 즐길 수 있는 란차 티테라스, 늦은 밤 칵테일을 즐길 수 있는 반타 라운지, 수영장의 풀사이드 메뉴에서도 같은 팀이 만드는 맛을 느낄 수 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날 아침, ‘곧 다시 만나요(See you soon)’라는 글자가 적힌 과일 접시를 받아들고 한동안 꺼놨던 스마트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호텔 예약 사이트에 접속해 12월의 어느 날로 이곳을 재예약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치앙마이=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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