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게 맛있네…fine, thank you

입력 2024-04-18 19:17   수정 2024-04-19 11:14


‘음미하다’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맛을 보든 음악을 듣든 눈을 감은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무언가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요즘 미식을 즐기는 방법이 달라졌다. 눈에 많은 걸 담을수록 경험의 농도가 짙어진다. 맛을 둘러싼 유·무형의 즐길거리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셰프는 더 이상 자기 음식을 뽐내는 공간을 접시에 국한하지 않는다. 테이블, 의자를 넘어 고객의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셰프는 메시지를 심어둔다. 고객이 음식을 맛보러 레스토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식사를 끝내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홀을 나갈 때까지 완벽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셰프들은 다양한 자극점을 배치한다.

고객의 미식 수준이 높아지면서 레스토랑의 경험 전쟁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일반 식당과 소위 고급 식당을 가르는 한 끗은 여기에서 나온다. 고급 인테리어나 비싼 식기만이 능사가 아니다. 5성급 호텔에서는 커틀러리의 무게뿐만 아니라 입에 넣고 빼기에 편한 각도까지 계산해 적절한 커틀러리 브랜드를 선정한다. 자신이 선보일 음식을 가장 돋보이게 해줄 그릇을 수집하는 셰프도 있다. 때로는 셰프와 유리공예가, 도예가 등이 협업해 레스토랑 전용 그릇을 제작하기도 한다. 라벨이 없어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옛날 선조들은 차를 마실 때 맛뿐만 아니라 찻잔의 온기, 도자기의 질감까지 감상했다고 한다. 한식 레스토랑에서 알록달록한 음식을 백자에 담는 것,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달달한 디저트를 선물상자 모양 도기에 넣어두는 것, 일식당에서 내어준 투명한 유리 접시 아래로 파도 모양의 그림자가 지는 것 등 기물이 주는 재미를 느끼다 보면 두 시간짜리 디너 코스가 꽤나 빨리 흘러갈 것이다.

창작자가 된 셰프들. 이들이 곳곳에 숨겨둔 디테일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껴보자. 맛을 보는 행위는 본능적이지만, 그 쾌감을 오래 기억하게 하는 건 신선한 경험들이다.
접시 질감, 포크 각도, 조명 밝기…파인다이닝엔 디테일이 살아있다
공간을 지배하는 셰프들

최근 레스토랑 업계에서는 접시에 음식을 배열하는 푸드 플레이팅뿐만 아니라 접시 디자인, 음식 배치, 테이블 세팅 등으로 요리의 주제를 표현하는 ‘푸드 프레젠테이션’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보기 좋은 떡’을 찾아다니는 미식 원정대들의 기준이 높아지면서 셰프 역시 예술가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이제 셰프들은 단순히 뛰어난 요리를 선보이는 것을 넘어 요리에 담긴 가치관을 고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 이들이 접시의 질감, 포크의 기울기, 조명의 밝기 등 ‘디테일’을 중시하는 이유다.

“음식 콘셉트에 맞게”…공예가와 협업

셰프에게 접시란 음식을 담아내는 것 그 이상의 기능을 한다. 하얀 민무늬 접시를 도화지 삼아 자신의 감각을 표현할 수도 있고, 화려한 접시를 다채로운 음식으로 장식해 단번에 손님의 눈길을 끌 수도 있다. SNS의 발달로 눈이 주는 즐거움이 중요해진 요즘,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예술가와 협업해 콘셉트에 맞는 기물을 제작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신라호텔 라연(미쉐린 2스타)은 한식의 정갈함을 표현하기 위해 백자 위주의 기물을 사용한다. 한식의 예와 격을 잘 표현할 수 있어서다. 가끔 포인트로 방자유기나 은기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런 기물은 모두 헤드셰프가 직접 작가들에게 연락해 개발을 요청한다.


또 다른 1스타 레스토랑인 레스케이프호텔 라망시크레 역시 계절별로 바뀌는 코스에 맞춰 접시와 커틀러리를 모두 별도 제작한다. 기존에 사용하던 로버트 웰치의 실버웨어 커틀러리는 라망시크레의 분위기에 맞춰 골드 색상으로 주문 제작했다. 프랑스 테이블웨어 브랜드 자크 페르게이와 협업해 꽃잎을 형상화한 메인 접시, 양배추 질감을 살린 디너 접시 등을 만들었다.

파인다이닝 셰프들은 전통 명품 그릇 브랜드보다는 자신의 음식과 잘 어우러지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선호하는 추세다. ‘정소영의 식기장’은 파인다이닝 셰프들이 기물을 조달하는 비밀 창고다. 식기장은 유리공예가, 금속공예가, 도예가 등 예술가들과 공예품을 공동 기획 및 제작하기 때문에 희소성이 높은 작품들을 구할 수 있다. 밍글스, 임프레션, 소설한남 등 유명 레스토랑이 이곳의 기물을 택했다. 우리 집 식탁에도 특별함을 더하고 싶다면 서울 청담동 쇼룸을 방문해 접시, 컵, 촛대, 매트 등 다양한 아이템을 구경해보자.

직접 그릇을 수집하는 셰프도 있다. 솔트의 홍신애 셰프는 빈티지 그릇에 제철 식재료를 활용한 음식을 푸짐하게 담아낸다.

초대합니다, 우리의 ‘공간’으로

우리는 의자에 앉아 식탁에 올라온 음식을 먹지만, 조금만 고개를 들면 벽, 천장, 창문 등 레스토랑의 전반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셰프와 크루들이 공간 디자인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음식의 집중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그에 걸맞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여러 요소를 고민한다.

전통 한식을 현대적인 조리법으로 해석해 내놓는 라연은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곳곳에 녹여냈다. 파티션은 소슬 빗살무늬로 제작했고 박서보, 서세옥 등 국내 작가의 작품을 벽에 걸었다. 프렌치 레스토랑 라망시크레는 붉은색을 사용해 로맨틱함을 표현했다. 벨벳 커튼과 낮은 조도의 조명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메뉴판은 붉은색 편지봉투 안에 넣어 설렘을 극대화한다.

바깥 풍경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부산 미쉐린 레스토랑 모리는 한쪽 벽면을 통창으로 만들어 해운대 바다와 백사장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했다. 그 어떤 작품보다도 일식 레스토랑에 어울리는 그림이다.

공간의 아름다움과 미식의 결합이 발전하면서 예술과 음식의 경계는 점차 흐릿해지고 있다. 1920년 프랑스 니스 언덕에서 소박한 카페로 시작한 라 콜롱브 도르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미술품 컬렉션을 모아오면서 세계 유명 맛집이자 걸작품 전시관이 됐다. 창립자 폴 루가 피카소, 샤갈, 브라크 등이 가난했던 시절 음식값 대신 그림을 받은 덕분이다.
온도 조절 블렌더, 기름 차단 조리복…셰프의 주방전투템
스타 셰프가 애정하는 도구
레스토랑 홀이 아무리 차분하더라도 주방은 늘 치열하다. 제한된 시간 안에 최상의 메뉴를 제공하기 위해 매일 전투를 치른다. 그렇기에 셰프들은 가장 효율적인 아이템을 곁에 둔다.

프렌치 론드리를 이끄는 세계적인 스타 셰프 토머스 켈러의 주방에서는 형광연두색 마스킹테이프를 꼭 볼 수 있다. 주방을 청결하게 관리하기로 유명한 그는 크루들에게 시리얼 박스를 크기대로 정렬하고 마스킹 테이프에 재료의 이름과 개봉일을 적어두라고 강조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해고할 정도라고. 형광연두색은 대부분 식재료와 보색을 이루기 때문에 눈에 잘 띈다. 깨끗하고 정돈된 주방은 셰프의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아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는 그의 믿음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장시간 서서 요리해야 하는 셰프들에게는 조리복도 중요하다. 우리나라 조리복 업계는 요리사 출신의 배건웅 대표가 설립한 ‘븟’이 꽉 잡고 있다. 배 대표는 2014년 조리복 제조회사 븟을 차리고 고급 조리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싼 원단을 사용해 가벼우면서도 내구성은 강하고 구김이 덜 가도록 했다. 뜨거운 기름이나 물을 잘 막아주는 기능도 더했다. 요리사로서의 경험을 녹여 만든 븟의 조리복은 편하고 실용적이라는 입소문을 타 금세 유명해졌다. 다른 조리복보다 네 배 정도 비싼 가격임에도 5성급 호텔, 미쉐린 셰프들이 그의 조리복을 찾는다. ‘조리복계의 에르메스’라는 별명도 붙었다.

셰프들은 조리도구를 선택할 때 가격보다 기능에 중점을 둔다. 강상욱 롯데호텔 월드 메인키친 헤드는 프랑스 모비엘의 구리 프라이팬을 좋아한다. 지름 26㎝ 프라이팬 가격이 개당 50만원에 달하지만, 프라이팬째로 음식을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능과 디자인이 모두 우수하다는 평가다. 온도 조절이 가능한 써머믹스 블렌더도 그의 애정템. 허브 오일을 추출하기 위한 최적의 온도를 맞춰주고 식재료를 부드럽게 갈아줘 프렌치 요리에 제격이다. 가격은 대당 400만원대.

한경제 기자 hanky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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