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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줄을 그어놓은 책을 읽을 때면 그 문장이 마음에 가기 마련이다. 연속적으로 그어 놓은 문장이 마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을 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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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린 봉그랑이 자신을 많이 닮았다고 말한 <밑줄 긋는 남자>의 주인공 콩스탕스. 로맹 가리를 좋아해 그의 책이라면 갖가지 판형을 모조리 사들인다. 25세 콩스탕스의 고민은 가리가 쓴 책이 31권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다른 작가들에게도 관심을 갖기 위해 빌려온 책 맨 마지막 장에서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을 읽으라는 글씨를 발견한다.
친구의 아이를 봐주고 간혹 잡지에 글을 기고하면서 무료하게 지내던 콩스탕스는 밑줄 그은 사람이 같은 층에 사는 이웃집 남자일 수도 있고 프랑스 대통령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며 점점 빠져든다. <노름꾼> 맨 마지막 페이지에 추천해놓은 로제 니미에 <이방의 여인> 주인공도 자신과 같은 10월생이라는 점에서 이상한 확신까지 갖게 된다.
누구를 보든 밑줄 긋는 남자와 연관시키게 된 콩스탕스는 급기야 밑줄 그어진 문장에 답변이 될 만한 문장을 찾아 자신도 밑줄을 긋고, 질문을 써넣기까지 한다. 어느 순간 본 적도 없는 밑줄 긋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집을 꾸미고 대화를 나누고 선물까지 마련한다.
그러다 앙드레 지드 <여인들의 학교>를 읽고 자기 행동이 “아주 그럴싸하지만, 너무 허황된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다시 성미 고약한 여자로 돌아와 답답하게 지내던 콩스탕스는 도서관 직원 지젤에게 그간의 일을 솔직하게 담은 편지를 쓴다. “받을 만한 이에게 전달해달라”는 부탁 덕분인지 얼마 후 “제가 당신을 꿈꾸듯이 저를 꿈꾸십시오”라는 달콤한 편지가 도착한다.
둘은 만나게 되고 몇 번 데이트하지만 콩스탕스는 클로드가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클로드도 지젤이 별 뜻 없이 보라고 준 편지를 읽고 연락했다며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라고 고백한다.
<밑줄 긋는 남자>의 문장들은 실제 도스토옙스키, 가리, 니미에, 키르케고르의 작품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 음악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해지는 소설이다.
특히 이세욱 번역가의 매끄러운 번역문 곳곳에 맛깔스러운 단어가 선물처럼 배치되어 있다. ‘가리사니, 엇겯다, 마디다, 시뻐하다, 손방, 강샘, 후무리다, 드레지다, 눈비음’ 같은 단어의 뜻을 찾아보며 격조 높은 표현법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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