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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의심했다. 얼마 전까지 한국이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던 첨단업종에서, 그것도 첫손에 꼽히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입에서 “중국에 ‘두뇌’를 두겠다”는 말이 나오다니. 한국에 꼭꼭 숨겨둔 기술도 빼가는 중국인데, 본토에 R&D센터를 세우면 기술 유출 가능성이 높아질 게 뻔할 텐데 말이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더니 이런 설명을 들려줬다. “기술 유출 걱정, 별로 안 합니다. 중국이 더 잘하거든요. R&D센터 지으려는 것도 중국 기술을 배우려는 겁니다.”
이 한마디가 한국경제신문이 지난주부터 내보내고 있는 ‘레드테크(중국의 최첨단 기술)의 역습’ 시리즈를 기획한 배경이 됐다. 중국의 첨단기술 수준을 짚어보고, 단기간에 실력을 끌어올린 비결을 찾기 위해 화웨이, 바이두, 텐센트 등 최고 테크기업을 찾았다.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정도만 빼면 중국은 한국을 라이벌로 생각조차 안 한다. 중국 기업인들 머릿속엔 온통 미국을 잡는 것만 들어 있더라.”
중국의 ‘첨단기술 굴기’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올 들어서만 “2022년 기준 중국의 136개 핵심 기술 수준이 미국 대비 82.6%로 한국(80.1%)을 처음 눌렀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고, “64개 첨단기술 경쟁력에서 중국이 53개 부문 1위로 미국(11개)을 앞섰다”는 호주전략정책연구소 분석도 나왔다.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중국 제조 2025’를 발표한 2015년이었다. 정보기술(IT), 로봇, 항공우주 등 10개 첨단 분야에 나랏돈을 쏟아부어 ‘양적 제조강국’에서 ‘질적 제조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 후엔 “중국이 무서운 건 각종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정부 주도로 10년 이상 미래를 내다보고 꾸준히 투자한다는 것”이란 차석원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장의 말대로 진행됐다. 불과 9년 만에 원료부터 부품, 완제품에 이르는 그럴듯한 첨단산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여기에 중국 특유의 ‘기업하기 좋은 인프라’가 더해졌다. 만드는 족족 구입해줄 든든한 내수시장 있지, 주 52시간 근무제 신경 안 쓰고 ‘밤샘 연구’할 이공계 인재 넘쳐나지, 사고 가능성이 있어도 일단 출시한 다음 보완하도록 각종 규제를 풀어주지…. 이쯤 되면 중국이 첨단산업을 못 하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거다. 그렇게 중국은 배터리(CATL)와 전기차(BYD) ‘세계 챔피언’을 배출했고, 인공지능(AI)과 자율주행, 로봇 분야도 미국을 바짝 쫓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정부가 작년 10월 내놓은 ‘국가 첨단전략산업 육성정책 현황 및 계획’ 자료를 보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다. “①반도체: 국가 경쟁력 좌우하는 핵심 산업→전방위 지원 확대 ②2차전지: 초기 시장 선점→지속 성장 도모 ③디스플레이: 중국에 LCD 추월→OLED 초격차 확보”
하나씩 따져보자. ①주요국 중 반도체 보조금을 안 주는 곳은 한국뿐이며 ②배터리는 CATL이 ‘한국 삼총사’의 합산 점유율을 압도하는 ‘중국 천하’가 됐고 ③OLED 역시 가장 수요가 많은 소형 패널 1위 자리를 올 1분기 중국에 내줬다.
불과 6개월 전 자료인데 뭐 하나 들어맞는 게 없다. 명색이 ‘국가 첨단산업 육성정책’이라면서 미국 같은 화끈한 보조금 지급이나 중국 같은 파격적인 규제 완화도 없다. 모든 나라가 “첨단산업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며 정부가 앞장서 키우고 있지만 한국만 예외다. 정부와 기업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팀 코리아’는 대체 언제쯤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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