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이 없다.”
시중 자금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현금성 자산에 몰리고 있다. 올 들어 자산관리계좌(CMA)·머니마켓펀드(MMF)·투자자예탁금에 새롭게 들어온 자금은 48조원 안팎이다. 그렇게 놀고 있는 돈이 벌써 350조원에 육박한다. 증시에선 마땅한 주도주를 찾기 힘들고, 밖으로 눈을 돌려도 마땅한 투자처가 보이지 않는다. 부동산 등 대체투자 시장은 얼어붙었고 금리 인하 여부도 불투명하다. 이런 가운데 밸류업 정책의 세제 혜택 포함,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등 주요 자본시장 관련 정책의 윤곽이 잡히지 않은 점이 자금의 증시 이탈을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15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7일 CMA·MMF·투자자예탁금 합계는 349조8804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나타냈다. 주식시장에서 빠진 ‘뭉칫돈’이 흘러든 결과로 풀이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들어 이달 14일까지 기관과 개인은 각각 10조3070억원, 8조3190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기관은 반도체주와 저PBR(주가순자산비율)주를 집중적으로 순매도했다. 삼성전자(4조6440억원) SK하이닉스(1조1610억원) 기아(4150억원) 삼성물산(2790억원) 등이다.
개인도 비슷했다. 현대자동차(3조910억원) 삼성물산(9040억원) 기아(6740억원) KB금융지주(6150억원) 하나금융지주(4340억원) 신한금융지주(4060억원) 등 ‘밸류업 테마주’로 꼽히는 저PBR주를 집중적으로 팔았다. 이들 종목 상당수는 밸류업 정책 기대에 힘입어 10~30%대 오름세를 나타냈다. 주가가 뛰자 장기 투자 대신 차익 실현을 선택한 것이다. 한 외국계 증권사 센터장은 “상장사의 주주친화책을 독려하는 밸류업 정책에 대한 불신이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이 정책엔 상장사가 주기적으로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마련해 자율적으로 공시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 담겼다. 정부는 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세제 인센티브를 저울질하고 있다. 오는 7월 기획재정부가 내놓는 ‘세법 개정안’에 배당 확대 기업에 법인세·배당소득세를 감면해주는 내용이 담길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하지만 이들 세제 개정안은 모두 입법 사항이다. 야당은 이 같은 개정안에 반대하고 있다. 밸류업 정책의 실효성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금투세 폐지 여부가 불분명한 점도 투자자 이탈을 불렀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금투세는 국내 주식·공모펀드 등으로 연간 5000만원이 넘는 이익을 거둔 투자자에게 부과하는 세금으로 세율은 차익의 20~25%다. 금투세는 당초 2023년 시행될 예정이었다가 2025년 1월로 유예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초 금투세 폐지를 선언했다. 하지만 최근 총선에서 압승한 더불어민주당이 여야 합의대로 내년부터 금투세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최근 발표한 논평에서 “금투세가 도입되면 150조원의 자금이 국내 증시를 떠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밖에 미국 일본 등의 증시 강세를 주도한 반도체 인공지능(AI) 관련주와 달리 우리나라는 마땅한 주도주가 없다는 점도 투자자금의 현금화를 부추기는 대목이다. 미국 중앙은행(Fed)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가 당초 예상보다 더뎌질 것이라는 관측 역시 주식 투자 위축을 불러왔다.
김익환/장현주/배정철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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