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대 향해 튀어!…'풋' 사랑에 빠진 그녀들

입력 2024-05-16 17:55   수정 2024-05-17 02:14


모든 공은 둥글다. 공을 차고 던지는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종목, 축구.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축구와 비슷한 놀이가 존재했으니, 어쩌면 인간이 만든 가장 원초적인 팀 스포츠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축구는 유독 여성들에겐 둥글지 못했다. 학창 시절엔 발야구, 피구와 같은 모호한 운동으로 대체됐고, ‘공 차는 여성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낯선 광경에 불과했다.

지금은 아니다. ‘미니 축구’라 불리는 실내 축구, 풋살 열풍이 거세게 불면서다. 축구공보다 더 작은 공으로, 축구장보다 더 작은 공간에서 더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여야 하는 풋살. 전국 각지에서 여성을 위한 풋살 클래스가 열리고, 대한축구협회(KFA)에 등록된 국내 여성 풋살 팀만 60여 개에 이른다. 풋살 인스타그램에 ‘#여자풋살’ 해시태그만 검색해도 12만여 개의 게시글이 존재한다. 수도권 곳곳의 빌딩 옥상은 ‘풋살장’으로 바뀌고 있고, 스포츠 브랜드들이 내놓는 풋살화와 풋살 용품들은 출시와 동시에 품절되기 일쑤다.

오늘도 약 1만 명의 여성 풋살러들이 전국의 풋살장을 누비고 있다. 평범한 주부, 대학생, 직장인, 자영업자까지 바쁜 일상의 일부를 쪼갠 이들이 잔디 위에서 땀을 흘린다. 그렇게 팀을 이뤄 뛰어본 이들은 안다. 넘어졌을 때 나를 일으켜줄 사람이, 지쳐 있을 때 나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줄 사람이, 작은 실수에도 힘껏 박수쳐줄 수 있는 사람이 언제나 옆에서 함께 뛰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주 웨이브 커버스토리는 아주 평범한, 골 때리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올해 한국경제신문 60년 역사상 처음으로 창단한 여성 풋살팀 ‘슈팅한경’에 소속된 14명의 선수가 지난 3개월간 함께 흘린 땀의 기록이기도 하다.
미니축구라고 얕봤다간 큰코…메시·호날두도 '풋살 마스터'
'5명 원팀' 풋살…1930년 아르헨 체육교사가 만들어

축구는 뛰기도 전에 지치는 스포츠다. 정식 경기를 치르기 위해 22명을 모으는 데 우선 진땀을 뺀다. 구장 대관도 만만치 않다. 한국에서 22명이 동시에 뛰어놀 수 있는 곳은 주로 학교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운동장이다. 조기축구회, 유소년 축구클럽 등 여러 단체가 매번 자리를 두고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인다. 장소와 머릿수에 얽매이지 않고 축구 경기를 할 방법은 없을까.

1930년 아르헨티나 출신 체육 교사 후안 카를로스 세리아니 감독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당시 우루과이에서 첫 번째 월드컵이 열리면서 남미 전역에 축구를 할 공간이 모자랄 정도로 열기가 엄청났다고 한다.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청소년 YMCA 대회를 준비하던 세리아니 감독은 어린 친구들이 실내체육관에서 농구나 핸드볼을 하는 대신 공을 차는 모습을 보고 새로운 형태의 실내 축구를 고안했다.

국제 풋살 대회가 처음 열린 것은 1965년이다. 우루과이 파라과이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이 참가해 파라과이가 우승한 남미 컵이었다. 1989년 국제축구연맹(FIFA)이 풋살 세계선수권대회를 주관하면서 현재 전 세계인이 즐기는 풋살의 경기 규칙 기준을 세웠다. 이후 4년에 한 번 풋살 월드컵이 열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프로축구 ‘K리그’에 버금가는 풋살 ‘FK리그’가 2009년 출범했다. 모두 13개 구단이 활동 중이다.


섬세한 볼 터치·개인기 위주의 풋살

풋살은 5명이 팀을 이뤄 하는 미니 축구다. 이름 그대로 축구(futbol·스페인어)를 실내(salon·프랑스어)에서 즐기는 경기다. 풋살장은 축구장의 4분의 1 크기다. 국제 경기에서 경기장 규격은 길이 38~42m, 너비 20~25m를 지켜야 한다. 약 60㎝ 둘레인 풋살공은 축구공보다 작고 묵직하다.

풋살과 축구 두 종목 다 손을 제외한 신체 부위를 써서 상대 골문에 공을 집어넣는 게임이다. 경기 시간 안에 더 많이 득점한 팀이 이긴다. 하지만 풋살을 단순히 ‘축구의 축소판’으로 볼 수만은 없다. 구장 크기에 따라 세부 규칙과 플레이 스타일이 근본적으로 달라서다.

먼저 공격 전개 방식이 다르다. 축구에서는 긴 패스와 구장 측면에서 중앙으로 보내는 크로스(센터링)가 중요하다. 두 골대 사이 거리가 멀어 드리블보다는 롱볼로 전진하는 게 효율적이다. 공간이 좁은 풋살장에서는 개인기로 기회를 만들어내야 한다. 중앙선에서 골대까지의 거리가 짧아 한두 번 드리블하면 어느새 골대 앞에 다다른다. 골대가 작아 공중으로 띄우는 슈팅보다는 구석을 노린 땅볼이 훨씬 위협적이다. 빠른 호흡의 경기를 즐길 수 있는 게 풋살의 묘미다.

메시와 호날두도 풋살 기술 익힌 이유

용어와 세부 규칙도 다르다. 수비수, 공격수, 골키퍼라는 포지션 이름을 풋살에선 쓰지 않는다. 풋살팀 포지션은 골레이로(골키퍼), 픽소(수비수), 아라(윙), 피보(포워드)로 총 4개가 있다. 경기는 5 대 5로 한다. 경기당 교체할 수 있는 선수는 7명이다. 교체돼 나간 선수도 다시 들어올 수 있다.

풋살은 오프사이드가 없다. 오프사이드는 A팀 공격수가 B팀 최후방 수비수보다 뒤에서 공을 받을 때 적용된다. 풋살에서는 최전방 공격수가 얼마든지 수비수 뒤에 있을 수 있다.

사이드라인을 벗어난 공을 구장으로 다시 들여보낼 때 풋살 선수는 손 대신 발로 ‘킥인’한다. 킥인은 4초 안에 해야 하고, 상대 팀 선수는 반경 5m 이내에 있으면 안 된다. 킥인을 통한 득점은 인정하지 않는다. 풋살의 세밀한 기술을 배우는 축구 선수도 많다. 펠레, 지쿠, 메시, 호날두 등 최고의 축구 선수들이 풋살로 기술을 갈고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차만별 풋살화…발볼 넓으면 미즈노, 좁으면 나이키
풋살 입문, 무엇부터 해야 할까
운동복과 풋살화는 필수다. 운동복은 뛰는 데 불편함이 없는 옷이라면 충분하다. 그러나 제대로 즐기려면 팀을 꾸려 유니폼을 제작하는 것을 추천한다. ‘공이 아니라 사람을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팀워크가 중요한 풋살에서는 팀원의 동선을 파악하는 게 기본이어서다. 또 가급적 긴 바지보다 짧은 바지를 입은 뒤 무릎 밑 길이의 니삭스를 신어주는 것이 공을 다루기에 적합하다. 여기에 정강이를 보호해주는 ‘신가드’까지 갖추면 금상첨화다.

풋살화는 선택지가 넘쳐난다. 디자인이나 색깔만 보고 덥석 고르는 건 금물이다. 발볼, 발등 높이 등에 따라 착용감이 미세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발볼이 넓은 편이라면 미즈노를, 좁은 편이라면 나이키를 신어보길 권한다. 이 밖에도 아디다스, 조마 문디알, 데스포르치 등 여러 브랜드가 있으니 꼼꼼히 비교해보고 선택하자. ‘풀착장’을 마쳤다면 이젠 함께 뛰어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풋살에 관심 있는 친구와 직장 동료가 있다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다. 전국의 ‘풋친자’(풋살에 미친 자)를 만날 수 있는 곳으로 가면 되니까.

(1) 체험 클래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면 고알레, 아워풋볼, 옌클, 위밋업스포츠 등 원데이클래스를 제공하는 시설부터 문을 두드려보자.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체계적으로 훈련받을 수 있다. 1회 체험권 가격은 2만원에서 4만원을 넘지 않는 수준에 형성돼 있어 큰 부담 없이 시도해볼 만하다.

(2) 소셜 매치

기본기를 익혔다면 실전에 뛰어들어볼 차례다. 풋살 구장 예약 플랫폼인 ‘플랩풋볼’을 활용하면 모르는 사람과도 팀이 될 수 있다. 스타터, 비기너, 아마추어, 프로 중 내 레벨이 어느 정도인지만 가늠해본 뒤 그에 맞춰 가능한 시간, 편한 장소에 예약만 하면 끝이다. 내가 이미 속한 팀이 있다면 팀 단위로 참가하는 ‘플랩팀리그’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다. 단 총인원이 6명 이상이어야 한다.

(3) 생활 체육

원데이클래스나 팀 매칭이 대부분 서울과 수도권 위주로 짜여 있다고 좌절하지 말자. 인스타그램에 ‘여성 풋살’을 검색해보면 전국 각지의 동호회가 운영하는 계정이 나온다. 또 구글에 ‘여자 풋살팀 전국 지도’를 검색하면 지역별 풋살팀 현황을 대략 파악할 수 있다.
구르고, 깨지고, 멍들며…그렇게 '풋친자' 됐다
여자 풋살팀 도전기…3개월 간의 땀과 열정의 기록

“왜 하는 거야?”

여자 풋살팀이 생겼다는 소문이 사내에 퍼지자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물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100m를 20초 안에 주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비루한 운동 신경의 소유자. 게다가 혼자 노는 게 좋은 ‘돌I형’ 인간. 이런 내가 주장이 된 건 순전히 나이가 제일 많아서인데 그게 그렇게 이상해 보였던 걸까. 아니면 다 큰 여자들이 모여 공을 찰 땐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는 비합리적 의심 때문일까.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진짜로 궁금해졌다. 우리는 왜 풋살을 하는 걸까.


팀원들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대회를 목표로 야심 차게 모인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팀에 합류한 건 석 달 전. 후배들 밥 사줄 요량으로 “나도 끼워줘”라고 했다가 잘못 엮인 나를 비롯해 대부분이 (발로 쓴 기사는 많아도) 발을 쓴 적은 없는 이들이었다. 우리 중 유일한 희망은 L기자. 평소 얌전하고 숫기 없기로 소문난 L은 공을 보자 눈빛이 돌변했다. 양발 드리블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비상한 실력을 갖춘 그를 우리는 입을 헤 벌리고 지켜봤다. 한 줄기 희망이 보였다. 문제는 선수가 부족하다는 것. 미천한 실력에 쪽수라도 많아야겠다는 생각에 열성적으로 ‘전도’를 시작했다. 최적의 영업 현장은 화장실이었다. 손 씻느라 무방비 상태일 때 다가가 슬쩍 운을 띄웠다. “축구 할래?” 당황한 틈을 타 예쁜 유니폼과 풋살화를 지원한다며 일단 한번 연습하러 오라고 유인했다. 눈동자가 흔들린다면 절반은 성공. 한 달도 안 돼 열네 명이 금세 모였다.

처음 한 달간 우린 사설 풋살장에서 1주일에 한 번 기본기를 배웠다. 지루할 줄 알았는데 두 시간이 금방 갔다. 다들 진심이었으나 몸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줬다. 패스하면 공이 이리 튀고 저리 튀며 난장판이었다. 연습보다 공 주우러 다니느라 바빴다. 왼발을 공 위로 한번 쓸어 넘긴 뒤 오른발로 공을 차는 페이크 동작을 연습할 땐 주정뱅이처럼 비틀거렸다. 모든 게 엉성했다. 시합을 하면 더 가관이었다. 공이 자꾸 선 밖으로 나가 경기가 도통 진행되지 않았다. 가만있지 말고 잔발구르기를 계속하라는데 잔망 떨 새도 없었다. 포메이션을 모르니 우르르 공으로 몰려가 들입다 헛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다리는 멍투성이가 됐다. 제 발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피가 줄줄 나는 날이 허다했다. 분명 공을 보고 헤딩했는데 맨땅에 처박혀 있질 않나, 걷어낸다고 갖다 댄 발에 맞은 공이 우리 골대로 쏙 들어가질 않나…. 그야말로 좌절의 연속이었다.


위기는 계속 찾아왔다. 다른 회사와 친선경기를 하다가 막내 M기자가 상대편 태클로 반깁스 신세가 됐다. 팀 내 가장 혈기 왕성했던 스트라이커를 잃었다. 그 와중에 H는 기쁘고도 슬픈 소식을 전했다. 운동을 열심히 한 덕분인지 2세 소식으로 더 이상 뛰지 못한다는 것. 팀의 주축인 L과 A의 잇단 해외 출장까지 매일 마감에 치이는 우리에게 ‘완전체’로 연습한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사진 찍을 땐 처음으로 모두가 모였다. 그 결과물이 국대급 뺨치게 나온 이 사진이다.

이기면 좋겠지만 우리는 이기기 위해 뛰지 않았다. 호기심에 시작했고 하다 보니 재밌었고, 같이 하니 더 신났다. 나 혼자 잘하면 되는 세계에서 살던 나는, 나 혼자 못하는 풋살 세계에서 민폐를 끼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풋살은 동료를 동지가 되게 하는 마법을 부렸다. ‘일도 힘든데 퇴근 후 굳이 회사 사람을 또 봐야 하나’라고 생각했던 나는 마감이 끝나자마자 풋살장으로 달려간다. 이렇게 멋진 팀원들과 일 말고 다른 일도 계속 같이하고 싶다. 풋살을 왜 하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함께할 수 있어서 한다고. 이기든 지든 슈팅한경팀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여성 풋살 인구 1만명…그라운드에 부는 '여풍'
작년 첫 아마추어 대회 개최

운동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체력 증진, 체중 감량, 자세 교정…. 목적은 다 다르지만 요즘 운동은 ‘나’의 동작에만 집중하는 것이 많다. 만약 혼자 하는 운동이 지겨워졌다면 남과 부딪치는 운동을 해보자. 팀원들과 부대끼며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 재미는 혼자 하는 운동과 차원이 다르다. 회사 일에 치이면서도, 자녀를 키우면서도 요즘 여성들이 짬을 내 풋살장으로 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풋살의 매력은 여러 가지다. 소수 인원으로 언제 어디서나 경기가 가능하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다섯 명만 모이면 한 팀이 구성된다. 골프, 테니스처럼 의상과 장비 부담이 크지도 않다. 경기가 없는 날에는 개인 훈련으로 기량을 끌어올리면 된다.

전개 속도도 빠르다. 전반 20분, 하프 15분, 후반 20분 구성으로 한 시간 안에 한 경기를 치른다. 축구에 비해 경기장과 골대가 작고 선수 수도 적다 보니 공격과 수비 전환이 쉼 없이 이뤄진다. 좁은 경기장을 쉴 틈 없이 달리다 보면 초심자는 10분을 온전히 뛰기에도 버거울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전략이다. 풋살은 전략 게임이다. 슛과 롱볼이 중요한 축구와 달리 풋살은 좁은 공간에서 패스와 개인기로 게임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상대의 포지션을 파악하고 우리 팀만의 전략을 세우면 개개인의 기량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시너지가 생긴다. 서로의 이름을 불러가며 콜플레이를 하다 보면 팀 간 친밀함이 높아지는 건 덤. 경기 중 넘어져 상처가 생기더라도 훌훌 털어낼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여성 풋살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기업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성 고객 위주이던 축구용품 시장은 최근 몇 년 새 여성 고객 수요를 반영해 범위를 넓혔다. 여성 전용 풋살화, 이너웨어 등을 새롭게 선보이는가 하면 직접 풋살장 운영에 투자하는 스포츠 브랜드도 있다. 공식 대회도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 풋살연맹은 작년 처음으로 아마추어 여자 풋살 대회를 열었다. 한국기자협회도 지난해 ‘제1회 한국기자협회 여성회원 풋살대회’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이달 25일 2회 대회를 앞두고 있다.

김보라/최해련/장서우/전예진/한경제 기자·슈팅한경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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