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 멀티플레이션 시대

입력 2024-05-30 17:55   수정 2024-05-31 00:32

이번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출장을 다녀왔다. 도착 첫날 저녁 물을 사러 다운타운의 한 호텔을 나섰다가 도망치듯 다시 돌아와야 했다. 거리의 홈리스들 때문이었다. ‘천사의 도시’ LA는 미국의 대표적인 ‘빈곤 도시’이기도 하다. 홈리스가 이곳으로 몰려드는 것은 시 당국의 관대한 정책 탓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날씨가 꼽힌다. 지중해성 기후로 1년 내내 햇살이 비추고 온화하다.

그런데 LA에 최근 이상기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겨울부터 이례적으로 비가 많이 내려 황무지에 풀이 자라고 꽃이 피어났다. 이른바 ‘슈퍼 블룸’이다. 소셜미디어에선 한때 LA 슈퍼 블룸 인증샷이 인기였다. 이례적으로 습도가 높아지면서 보기 힘들었던 모기가 출몰하고, 알레르기 환자도 늘었다고 한다. 올 들어 LA엔 ‘비의 도시’ 시애틀보다 비가 더 내렸다. 지난겨울과 봄 강우량은 평년보다 200% 가까이 많았다. 엘니뇨의 영향이다.
치솟는 식품 물가
이상기후는 많은 것을 끌어올리고 있다. 지구의 평균 기온과 해수면은 물론 물가 상승 요인으로도 지목된다. ‘기후플레이션(climateflation)’이란 신조어도 탄생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극한 날씨 탓에 농작물 생산량이 감소해 식료품 물가가 오르는 현상을 의미한다. 최근 등장한 ‘애플레이션’ ‘초코플레이션’ 등도 같은 맥락이다. 세계적으로 코코아, 올리브유, 설탕, 커피 등이 이상기후에 따른 작황 부진으로 가격이 치솟고 있다.

코코아 가격은 올해 들어서만 두 배 이상 폭등했다. 초콜릿의 주원료인 카카오는 세계 생산량의 60%가 가나, 코트디부아르 등 서아프리카에서 생산된다. 이들 지역이 극심한 폭우와 폭염에 시달리자 생산량이 급감해 코코아 가격이 치솟은 것이다. 올리브와 커피도 마찬가지다. 올리브는 주산지인 스페인의 가뭄 탓에, 로부스타 커피는 베트남의 기록적인 고온 현상 때문에 가격이 전년 대비 두 배 안팎 뛰었다.
작물지도 변화에 대비해야
물가 움직임은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영향을 주로 받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상기후와의 연관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 지난달 과학저널 네이처는 “기후이변으로 식품 인플레이션이 향후 10년간 연간 3%포인트씩 상승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중앙은행이 제일 곤혹스러운 점은 기후 변화가 사과 등 농산물 가격을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상기후 여파로 원재료 가격이 급등하자 식품·외식업체들은 제품 가격 인상에 나섰다. 롯데웰푸드와 BBQ는 다음달부터 초콜릿과 치킨 가격을 올린다. 모두 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인상 시기를 늦췄다. 하지만 기업을 압박해 인상을 잠시 미루는 ‘보여주기식 정책’이 해결책이 될지 의문이다.

세계경제포럼은 지난 2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이상기후가 농작물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은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장기적으로 기후와 작물지도 변화에 대비한 품종 개발과 푸드테크 기업 육성에 적극 나서야 한다. 해외 농업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국제기구를 통한 협력을 강화하는 등 농업 외교 기반도 다져야 한다. 정치·경제 안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식량 안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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