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습고 화나고 애잔해…'재벌집 막내딸' 전도연

입력 2024-06-05 18:50   수정 2024-06-06 00:48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이 건드리는 감정은 복합적이다. 러시아 혁명 직전의 귀족 가문이 어이없이 몰락하는 모습은 애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쾌하다. 한심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4일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연극 ‘벚꽃동산’도 그렇다.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체호프의 희곡을 2024년 대한민국에 투영한 작품이다. 배우 전도연(사진)이 27년 만에 연극에 출연한다는 소식에 공연계가 들썩였다.

연극은 송씨 가문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재벌 3세인 송재영·도영 남매는 선대가 쌓아둔 막대한 부를 날려 먹고 쪽박을 찰 위기에 처했다. 회사가 파산 직전에 내몰렸지만 넋이 나가 있다. 오빠 재영은 무능력하고, 전도연이 분한 여동생 도영은 현실을 기피한다.

도영은 열여섯 살에 집을 선물받은 ‘다이아몬드 수저’로 어떤 일이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든 풀리겠지.” 그는 자신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을 잊기 위해 술과 마약과 남자에 취해 인생을 소비한다.

대책 없는 가문에 황두식이 등장한다. 선대 회장 운전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두식은 어릴 적 도영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송씨 가문의 회사를 살려주려고 하지만 헛일이다. 두 남매는 노을을 바라보며 청승만 떤다.

결국 송씨 남매의 하인이 다름없던 두식이 송씨 가문의 회사를 매입하고 기세가 등등해진다. 황두식 역을 맡은 박해수는 “당신들의 과거와 미래를 샀다”며 남매를 비웃고 호통친다.

1997년 ‘리타 길들이기’ 이후 처음으로 연극에 도전한 전도연은 물색없는 송도영의 엉뚱한 유머를 뻔뻔하면서도 찰지게 그렸다. 관객들에게 독백을 하고 있는데 오빠 재영이 끼어들자 “오빠 잠깐만, 나 말하는 중이잖아”라며 푼수처럼 말을 잘라 관객의 웃음을 자아냈다. 자기 딸과 잠자리를 한 젊은이에게 “벌써 끝났어요”라고 묻는 등 과감한 대사를 맛깔나게 소화하면서 연극 전체에 신선함과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는 우습고 화가 끓게 하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체호프의 원작 속 라네프스카야 부인이었다.

박해수는 성공을 이루고도 열등감을 떨치지 못하고 공허함에 시달리는 모습을 절절하게 표현해냈다. 인정 욕구를 채우지 못해 미친 사람처럼 괴성을 지르는 모습은 거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스톤 연출가는 “박해수의 연기에는 나약함과 강인함이 모두 있다”고 평가했다.

‘벚꽃동산’이 희극이면서도 비극이라던 스톤 연출가는 한 장면 안에도 희극과 비극을 버무렸다. 비극적인 순간에도 눈치 없이 유머가 등장하는데 억지스럽지 않고 몰입을 깨지 않아 깜짝 놀란다. 밑도 끝도 없는 유머는 단지 웃음을 유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작품 속 혼돈을 더욱 신랄하게 전하는 장치로 쓰인다. 스톤 연출가는 처음에 완벽한 대본을 내놓지 않고 연습 때마다 매일 ‘쪽대본’을 써가며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연출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연극은 150분간 희로애락의 감정을 두루 자극하고 공연장이 찢어질 듯한 전자기타의 불협화음으로 막을 내린다. 갑자기 뚝 하고 음악 소리와 조명이 꺼지면서 끝나는 공연. 억지로 암시나 여운을 남기지 않는 결말이다. “모든 관객이 똑같은 생각을 하길 원치 않는다”는 스톤 연출가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공연은 오는 7월 7일까지 열린다.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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