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 '미식살롱'…추억의 경양식이 시작된 곳

입력 2024-06-13 17:59   수정 2024-06-14 02:35


시시각각 바뀌는 유행 속 핫플레이스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이는 곧 유행이 된다. 서울 제기동 경동시장과 신당동 중앙시장의 부흥, 오래된 상가가 밀집한 을지로3가가 ‘힙지로’로 변모한 것 모두 미식의 힘을 바탕으로 했다.

우리나라에 서양식 식당이 막 생겨나기 시작한 20세기 초반, 당시 유행을 선도하던 모던걸과 모던보이는 백화점이나 사대문 인근 양식집에서 만나야 요즘 말로 하면 ‘힙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경성의 부자들은 호텔에서 프랑스식 코스요리를 맛보는 게 유행이기도 했다. ‘서양료리’로 가득한 호텔 식당은 그야말로 신세계였으리라. 1910년대 조선호텔, YMCA그릴, 청목당, 백합원그릴 등은 ‘일반 시민’에게도 서양 요리를 팔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서양 요리가 백화점으로 들어가면서 더 많은 사람이 즐기게 됐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는 프랑스식 카스텔라를 만드는 법이 소개됐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인 태화여자관에서는 서양 요리 강습이 열리는 등 새로운 식문화가 뿌리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식과 서양식의 융합 과정에서 생겨난 ‘경양식’이라는 새로운 장르는 한때 우리나라 외식업계의 ‘주류문화’가 됐다. 1970~1980년대 돈가스, 함박스테이크(햄버그스테이크), 오므라이스 등은 가족 외식 메뉴로 큰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은 레스토랑에서 맛본 음식을 집에서 직접 요리하며 서양식에 한층 가까워졌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주인공 라미란은 이웃 주민들에게 함박스테이크를 대접하겠다며 총각무와 쌀밥을 한 접시에 담아 내놓는다. 그렇게 낯선 요리는 우리 식탁에 정착했다.

‘두바이 초콜릿’이 삽시간에 유행을 탈 정도로 전 세계 식문화 교류가 활발한 지금이지만, 돌이켜보면 한국인이 포크와 나이프를 든 것은 100년 정도밖에 안 됐다. 어떻게 경양식과 뷔페 등 ‘서양료리’를 접하게 됐을까. 숟가락과 젓가락 대신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야 했던 20세기 사람들의 충격을 함께 느껴보자.
100년 전 줄 서는 식당…모두 서울 중구에 있었다
'경양식의 품격'을 지켜온 식당들
'96년 역사' 최초의 경양식당 서울역 그릴
함박스테이크 팔던 개화기 인싸들 아지트

1971년 문 연 신세계백화점 식당 까사빠보
미술관 옮겨온 듯 옥상에서 예술작품 감상

이병철 회장이 즐겨 찾던 이탈리안 식당
라칸티나에선 '삼성세트'가 히든 메뉴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 번 읽었다
그것들은 아물아물하는 것이 어딘가
어렸을 때 동무들 이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 작가 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서울역 그릴을 묘사한 대목

“그리고는 경성역 일이등 대합실 한곁 티이루움에를 들렀다. 그것은 내게는 큰 발견이었다. (중략)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번 읽었다. 그것들은 아물아물하는 것이 어딘가 내 어렸을 때 동무들 이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소설가 이상이 1936년 발표한 ‘날개’에서 무직(無職) 지식인 ‘나’는 아내가 매춘으로 번 돈을 쥐어 들고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으로 향한다. 역사 안 티룸(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시킨 나는 밤 11시 영업이 끝날 때까지 테이블을 떠나지 못한다. 커피 맛을 잊지 못한 나는 며칠 후 티룸을 다시 찾았지만, 돈이 없어 그 주변만 하염없이 서성인다.

경성역 1층의 티룸, 그리고 2층의 양식당은 개화기 모던걸, 모던보이가 모이는 ‘핫플레이스’였다. 2층 양식당 이름은 ‘서울역그릴’. 1925년 문을 연 한국 최초의 경양식집이다. 2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곳은 당시 요리사만 40명이었다고 알려졌다. 함박스테이크와 돈가스, 커피, 홍차 등 생소한 서양식 메뉴를 팔았고 가격도 비쌌다. 자연스럽게 당대 유행에 민감한 이들이 선망하는 장소가 됐다.

서울역그릴은 광복 이후에도 영업을 이어갔다. 6·25전쟁, 외환위기 등 숱한 위기도 넘겼다. 그러다 2021년 문을 닫았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이었다. 96년간 이어지던 서울역그릴의 역사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서울역그릴은 사라졌지만 수십 년의 세월을 간직해 온 경양식 레스토랑은 서울 시내 곳곳에 여전히 있다. 서울 소공동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까사빠보’, 서울시청 인근 ‘라칸티나’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다.


신세계百, ‘71년 개장’ 경양식집 부활시켰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에는 스페인어로 ‘공작의 집’을 뜻하는 일본식 양식당 까사빠보가 있다. 까사빠보가 문을 연 건 1971년. 오므라이스, 돈가스 등 일본식 경양식과 오렌지주스 등이 주력 메뉴였다. 국내 최초의 백화점 레스토랑인 이곳은 신세계백화점을 방문하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로 당시 입소문이 자자했다.

잠시 문을 닫은 까사빠보가 2017년 같은 건물 6층에서 영업을 재개했다.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헤리티지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1970~1980년대 인기 메뉴인 오므라이스, 함박스테이크 등 경양식 메뉴를 판다. 모나카 아이스크림과 케이크, 과일 파르페 등 정겨운 디저트 메뉴도 있다.

1970년대 까사빠보가 인기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여유로운 분위기’다. 지금의 까사빠보가 마치 현대미술관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예술작품을 들인 이유도 이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서다. 까사빠보 창문 너머에 있는 트리니티 가든에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아이벤치’, 헨리 무어의 ‘와상: 아치형의 다리’, 호안 미로의 ‘인물’ 등 미술사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예술가의 작품이 즐비했다.

국내 최장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칸티나’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1-1번 출구 앞 삼성화재 건물 지하에는 1966년 문을 연 라칸티나가 60년 가까이 성업 중이다.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의 단골 식당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라칸티나라고 적힌 초록색 간판 아래 가파른 계단을 타고 한 층을 내려가면 붉은색 벽돌로 쌓아 올린 아치형 입구가 고객을 맞이한다. 이탈리아어로 ‘지하에 있는 와인창고’라는 뜻의 식당 이름과 묘하게 걸맞은 분위기다.

라칸티나의 간판 메뉴는 ‘링귀니 라칸티나’. 정통 이탈리아식과는 거리가 있지만 마니아층이 상당하다. 조개수프가 아닐까 싶은 정도로 넉넉한 국물에 바지락살을 넉넉히 올린 게 특징이다. 라칸티나에는 ‘메뉴판에 없는 메뉴’를 주문하는 재미도 있다. 5만3000원짜리 ‘삼성세트’가 대표적이다. 양파수프에 마늘빵, 링귀니 라칸티나, 안심스테이크, 샐러드가 나오는 세트 메뉴다.

한때 종로구 팔판동에 있다가 몇 년 전 중구 예장동 오리엔스호텔로 자리를 옮긴 경양식당 ‘그릴데미그라스’도 대표적 경양식 레스토랑으로 꼽힌다. 햄버그스테이크, 비후까스, 새우프라이 등 세월의 흔적이 묻은 메뉴 이름이 정감 있다.

"여기 국그릇 없어요?"…그 시절 호텔 뷔페에선 접시밥 소동이 일상
맛도 가격도 특급…50여년 전 호텔로 들어온 '해적들의 식사'
전쟁 직후 국립의료원에 들어선
북유럽 의료진 식당 스칸디나비안클럽

대중들도 갈 수 있었던 최초 뷔페는
웨스틴조선 아리아의 뿌리 갤럭시
라세느·더파크뷰까지 '호텔뷔페 3대장'

트렌드에 맞춰 즉석요리 비중 늘리고
딸기 뷔페 등 계절마다 화려한 디저트


각자 원하는 메뉴를 줄지어 덜어 먹는 방식. 지금이야 너무나 익숙하지만, 뷔페가 처음 국내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접시밥’은 한국인에게 생소했다. “음식을 왜 내오지 않느냐” “어떻게 밥그릇 국그릇도 없이 접시에 밥을 먹느냐”는 항의가 뷔페 레스토랑에 끊이지 않았다. 새로운 식문화가 스며들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50여 년이 지난 현재 뷔페는 가족, 친구, 애인과 함께 즐기는 보편적인 식문화가 됐다.

바이킹이 시작한 뷔페 식사, 미국에서 확산

뷔페라는 식사 방식은 바이킹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처럼 얘기된다. ‘해적질’하는 동안에는 배 안에서 간단한 음식만 먹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면 온갖 신선한 음식들을 차려 놓고 밤낮으로 즐겼다고 한다. 스웨덴에서는 이런 형태의 상차림을 ‘스뫼르고스보르드’라고 불렀다. 이후 17~18세기 프랑스에서 뷔페가 유행하면서 우리가 아는 현대적인 뷔페 형태가 됐다. 뷔페(buffet)라는 단어도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어로 뷔페란 열차나 정거장 안에 있는 간이식당을 뜻한다. 제한된 구성의 코스요리가 지겨웠던 프랑스인들은 다양한 요리를 마음껏 맛볼 수 있는 뷔페에 흥미를 느꼈고 이는 19세기에 영미권으로 퍼져나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뷔페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 호텔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했다. 카지노에 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해 시계, 거울, 창문까지 없애버린 운영자들은 고객의 식사마저 뷔페식으로 제공해 고객들이 최대한 한 호텔에 오래 머물도록 유도했다. 뷔페는 손님들이 한 번 입장하면 오래 앉아 음식을 소비하기 때문에 손님을 다른 호텔로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었다.


국내 최초의 뷔페 레스토랑 ‘스칸디나비안클럽’ 역시 북유럽의 향기가 묻어 있다. 1958년 국립의료원에 문을 연 스칸디나비안클럽은 당시 한국에 파견된 북유럽 3개국(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의료진에만 허용된 구내식당이었다. 1968년 의료진이 철수할 때까지 이곳에서는 청어 요리, 안초비 그라탱 등 북유럽풍 음식이 매일 제공됐다. 첨단 냉장 및 냉동 시설이 구비돼 있었다. 식재료는 북유럽 현지에서 조달해 의료진의 향수를 달랬다. 외교관, 기업가, 외국인들의 모임 장소이자 우리나라 뷔페 역사의 첫 장을 연 스칸디나비아클럽은 2012년 문을 닫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짜장면의 20배…고급 식사로 자리 잡다

우리에게 익숙한 뷔페는 호텔식 뷔페다. 국내에서도 1970년대부터 호텔 뷔페의 경쟁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뷔페를 선보인 곳은 웨스틴조선 서울. 1970년 조선호텔 재개관에 맞춰 ‘갤럭시’(현 아리아)라는 이름의 뷔페를 선보였다. 일반인에게도 문을 연 최초의 뷔페다. 점심식사로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콜드미트, 생선, 치즈 등 서양인을 위한 양식 메뉴들을 비롯해 한국 손님을 위한 다양한 한식 메뉴를 제공했다. 1979년 롯데호텔 서울이 ‘라세느’를, 같은 해 서울 신라호텔이 ‘더파크뷰’를 개장했다. 현재 ‘호텔 뷔페 3대장’으로 불리는 곳이다.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었지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식사는 아니었다. 1980년 갤럭시의 점심 가격은 6655원(세금 포함·팁 불포함)으로 동시대 짜장면 한 그릇 가격(평균 399원)의 17배에 달했다. 이때 병장 월급이 3900원이었으니, 병장 월급의 두 배 수준이다. 현재 특급호텔의 뷔페 가격이 10만원대 후반에 형성돼 있는 것을 고려하면 절대적인 금액은 상승했지만, 뷔페 접근성은 개선됐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뷔페를 찾은 손님들은 낯선 음식을 하나씩 음미하며 경계심을 풀어나갔다. 호텔 뷔페가 새로운 음식을 들여오는 항구 역할을 한 것이다. 그 역할은 21세기 들어서도 유지됐다. 2000년대 중반 쌀국수, 인도 커리 열풍이 시작된 곳도 서울 강남의 특급호텔 뷔페에서였다.

요즘엔 밥보다 디저트 먼저?

세대를 거듭할수록 미식 수준은 높아졌고, 특급호텔 뷔페도 변화의 흐름을 탔다. 최근 트렌드는 프리미엄. 음식을 잔뜩 조리해 쌓아두기보다 고객이 찾는 즉시 조리해 제공하는 방식을 택한다. 롯데호텔 라세느의 경우 150여 가지 메뉴 중 즉석요리 비중이 70%에 달한다. 조선호텔앤리조트 또한 뷔페 스테이션 위에 올려 놓는 음식의 양을 10인분 내외로 철저히 유지한다. 신라호텔 더파크뷰는 다양한 국적의 음식을 해당 국적 요리사가 직접 조리해 본토의 맛을 구현하는 데 힘쓰고 있다.

SNS 발달과 함께 디저트의 중요성도 커졌다. 호텔업계에서는 봄철 ‘딸기 뷔페’, 여름철 ‘애플망고빙수’ 등 계절마다 ‘디저트 대전’이 펼쳐질 정도다. 뷔페 레스토랑에서도 디저트의 존재감은 확대됐다. 호텔업계 관계자는 “고객들은 큰 접시 위에 시그니처 메뉴를 올리고 디저트까지 담아내 자신만의 ‘한 접시’를 만들기 원한다”며 “화려한 디저트 스테이션을 입구에 배치해두니 디저트를 먼저 먹는 손님도 상당히 늘었다”고 설명했다.

한경제/양지윤 기자 hanky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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