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가득한 미술관서 고구마 굽더니…" 관람객들 '깜짝'

입력 2024-06-20 18:57   수정 2024-06-21 02:55

이곳엔 샘 켈러(57)라는 천재 기획자가 관장으로 있다. 켈러는 예술을 배운 적도 없고, 예술가 집안 출신도 아니다. 기업가에 가까웠던 그는 우연히 아트바젤의 디렉터로 일하다가 아트바젤을 마이애미로 옮기는 아이디어를 실현했고(2001년), "유럽 박람회를 글로벌 더블 이벤트로 만든 천재"라는 찬사를 받으며 예술계에 진입했다.


‘아트바젤 2024’가 한창 열리고 있던 지난 13일. 스위스 바젤 시내에서 15분간 트램을 타고 외곽 리헨(Riehen)으로 향했다. 독일과 스위스 접경에 있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동네. ‘바이엘러’역에 내리자 얕은 담장이 맞이하는 미술관이 나타났다. ‘바이엘러 재단’의 자취는 담장처럼 소박하지 않다. 모네의 ‘수련’을 실제 연못 앞에서 바라볼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미술관이자, 지난 25년간 800만 명 이상이 방문한 스위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술관이라서다.

‘바이엘러 재단-LUMA재단 5.19-8.11’이라는 검정 글씨의 포스터만 보고 미술관을 찾았다. 입장을 하고 나서야 전시명이 ‘Dancing with Daemons(악마들과의 춤을)’라는 걸 알게 됐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는 홈페이지에 ‘Home for Strangers(낯선 이들을 위한 집)’로 이름이 바뀌어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예술품들의 아름다운 묘지, 바이엘러
바이엘러재단 미술관은 1997년 지어졌다. 에른스트(1921~2010)와 그의 아내 힐디(1922~2008) 바이엘러가 400여 점의 소장품을 기증하며 설립됐다. 모네, 반 고흐, 피카소, 마티스 등의 현대 걸작과 마크 로스코와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잭슨 폴록에 이르는 전후 거장에 동시대 예술가 작품까지 그야말로 명작 중의 명작 400여 점이 영구 소장돼 있다.

바이엘러 부부는 세기의 컬렉터이자 아트딜러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절친이기도 했던 에른스트는 무엇보다 바젤을 예술의 도시로 만든 주역이다. 바젤의 작은 골동품 서점에서 일하던 에른스트는 주인이 작고하자 이를 물려받아 갤러리로 조성하고, 1970년 아트바젤을 처음 만들었다. 이후 이탈리아 건축가 렌초 피아노에게 소장품들이 더 빛날 수 있도록 공간을 의뢰했다. 푸른 전원 풍경과 자연 채광을 한껏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완성됐다.


여기까지는 세계적인 미술관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곳엔 샘 켈러(57)라는 천재 기획자가 관장으로 있다. 켈러는 예술을 배운 적도 없고, 예술가 집안 출신도 아니다. 기업가에 가까웠던 그는 우연히 아트바젤의 디렉터로 일하다가 아트바젤을 마이애미로 옮기는 아이디어를 실행했고(2001년), “유럽 박람회를 글로벌 더블 이벤트로 만든 천재”라는 찬사를 받으며 예술계에 진입했다. 에른스트의 요청으로 2008년 바이엘러 재단에 합류한 그는 올라푸르 엘리아손, 폴 고갱, 프란시스코 데 고야, 게오르그 바젤리츠, 조지아 오키프 전시 등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1세기 미술관은 사람을 위한 곳
이번 전시는 켈러가 8명의 세계적인 큐레이터와 2년간 머리를 맞댄 결과다.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 공동 관장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로슈의 상속녀이자 아를 박물관 단지를 운영하는 루마재단 설립자 마야 호프만 등이 참여했다. 예술가들의 면면은 더 화려하다. 현재 리움에서 전시 중인 필립 파레노를 포함해 후지코 나카야, 피에르 위그, 리크리트 티라바니야, 구정아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미술관을 만들자”고 뜻을 모았다. 큰 주제는 자연과 세계, 생태와 인간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켈러 관장은 “미술관은 관습을 깨야 한다. 20세기 미술관이 작품을 위한 곳이었다면, 21세기 미술관은 사람을 위한 장소가 돼야 한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선 야외 정원에서 먼저 압도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필립 파레노의 ‘멤브레인’(2024)은 미술관 연못 옆에 설치됐다. 외계 생명체 같은 움직이는 거대한 탑. 검은 와이어로 연결된 투명한 물체가 상하 운동을 하는데, 커다란 확성기에서 개구리 울음 소리가 메아리처럼 퍼진다. 그때 연못에선 뿌연 안개가 분사돼 모든 것을 가린다. 사람도, 작품도, 미술관조차도 연기 속에 사라지는데, 일본 예술가 후지코 나카야의 설치 작품이다.

베이컨 보는 자코메티, 모네 수련 위 돌덩이
실험적인 쇼는 전시장 안에서도 계속된다. 로비에서 갤러리 직원들이 쉴 새 없이, 그러나 조심스럽게 그림을 옮겨댄다. 사람들은 “잘못 들어왔나” 두리번거리지만, 그 자체가 전시의 일부다. 바이엘러의 영구 컬렉션들은 다닥다닥 붙어 전시돼 있다. 몬드리안 옆에 엘즈워스 켈리의 추상화가, 그 옆에 로니 혼의 올빼미 두 마리가 호를 그리며 배치되는 식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대형 여성 조각 ‘Grand femmeⅢ’과 ‘Grand femmeⅣ’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여인을 기리는 3부작 ‘조지 다이어를 기억하며’ 앞에 서 있어 묘한 감정을 자극한다.

연못이 보이는 통창 옆에 있는 모네의 수련 위, 마크 로스코의 검은색 작품 앞엔 구정아 작가의 설치 작품 ‘불가사의 불가사리’(2024) 덩어리가 함께한다.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가 달빛 쏟아지는 바다를 그린 1951년작 ‘Humboldt Current’는 볼프강 틸만스가 2010년대에 촬영한 행성 사진과 같이 걸려 여운을 더하기도 했다.

매일 가도 매일 다른 전시회
눈치가 빠른 관람객들은 전시실 두어 군데만 돌아봐도 전시 도록 따위는 구겨 넣고 관람에 집중한다. 아드리안 빌라 로하스의 ‘상상의 끝’ 작품 연작은 나무와 인간, 로봇의 중간쯤 돼 보이는 설치물. 전자기기가 뿌리처럼 존재하는데, 전시 중 세탁기에서 빨래가 돌거나 18분에 한 번 고구마를 굽는다.

사람들이 제일 오래 머무는 공간은 조각의 방이었다. 자코메티가 바라보는 피카소의 조각, 토마스 슈트의 조각과 브랑쿠시의 조각 등 세월을 거슬러 이미지의 유사성이 있거나 완전히 대조되는 작품들을 병렬 배치해 해석의 여지와 재미를 남긴다. 독일 예술가 카르스텐 횔러는 뇌과학 연구자 아담 하르와 어두운 동굴 같은 침대를 만들어 (숙박 예약을 한 사람들에 한해) 전시장 내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했고, 어떤 공간에선 무용수들이 노래하며 춤을 춘다.

자연과 생태,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려는 전시의 원래 목적처럼 작품과 작품 사이에서 잉태되는 새로운 에너지, 그것을 다르게 바라보는 관람자의 에너지가 끊임없이 교차한다. 예술에 대한 지식의 깊이 등에 따라 이 전시는 누군가에겐 ‘인생 전시’로, 누군가에겐 ‘기묘한 기획’으로 다가갈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자들이 모토로 삼았다던 ‘모든 것은 흐른다’는 그리스 격언 ‘판타 레이(Panta rhei)’는 실현에 성공했다. 미술관이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지 그 실험의 끝을 보여준 건 확실하기 때문이다. 모든 작품은 위치가 계속 바뀌고, 전시명도 여러 번 다른 문구로 변한다. 8월 11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언제 갔느냐에 따라 각자 매번 다른 걸 보고 오는 셈이다.

바젤=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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