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어 한지 불태운 30년…산이 되고 바다가 됐다

입력 2024-06-25 18:22   수정 2024-06-26 00:30


살랑살랑 일렁이는 물결, 사이좋게 운율을 맞추는 첩첩의 산봉우리들. 그 앞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울었다. 왜인지 도무지 이유도 모른 채. 지난 11일부터 엿새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52번째 아트바젤의 ‘언리미티드’ 섹션. 그중 한 공간을 차지한 김민정 작가(사진)의 ‘Traces’ 연작 이야기다. 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아트바젤의 대규모 기획 전시에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70점의 작품 안에 선정됐다.

불에 태운 한지가 겹겹이 쌓여 먼바다의 물결처럼 보이는 ‘Traces-Timeless(영원)’ 두 점이 마주 보고 있는 사이, 가로 8m 길이의 ‘Traces-Mountain(산)’이 끝없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산은 먹으로 농도를 조절하며 풍경을 그려냈고, 영원은 촛불로 한지를 그슬어 배열하는 방식으로 완성했다.

13일 아트바젤 언리미티드 전시회 현장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광주에서 태어나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배우고, 1991년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국립미술원으로 떠난 그는 30여 년간 서예와 수묵화, 동양철학을 탐구했다. 지금은 주로 남프랑스 생폴드방스에 머물며 미국을 오간다. 타국살이 30년이 넘었지만 그의 한국어에는 구수한 남도 방언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살려고 한 거예요. 살려고. 20대 때 힘든 일을 많이 겪으며 몇 번 죽으려고 했거든. 숨 붙어 있는 게 고통이었어요. 이후의 모든 시간이 나를 찾는 과정이었고, 내 몸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감당할 수 있는 재료로만 작품을 해야 했어요.”

동양화를 전공한 그에게 한지는 가장 연약하면서도 가장 강한 재료다. 2000년 무렵부터 종이를 가늘게 잘라 숨을 조절해가며 촛불로 가장자리를 태운 뒤 섬세하게 배열하는 작업을 주로 했다. 반복적이고 노동 집약적인 작업 방식은 수행자의 고행과 닮았다.

“아주 연약한데 세상에서 가장 오래가는 종이가 한지잖아요. 그걸 또 태워 없애버리는 게 작은 촛불이죠. 힘든 시간을 통과하며 나를 태워 없애버려야 살 것 같았어요. 이 그슨 흔적을 아주 일정하게 조절해 선을 만드는 작업은 쉽지 않아요. 도통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집중력이 필요하거든.”

그의 작품은 해외에서 먼저 알아봤다. 이탈리아 토리노의 폰다치오네 팔라초 브리케라시오, 덴마크 코펜하겐의 스비닌겐미술관,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아시아 소사이어티 등이 그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 현대미술관(2012), 싱가포르 에르메스 재단(2017), 영국 런던 화이트 큐브(2018)와 대영박물관(2019), 파리 알민 레슈와 생모리츠 로빌란트+보에나 등 세계 유수 기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작품이 알려진 것은 독일 출신의 세계적 미술사가이자 큐레이터인 장크리스토프 암만(1935~2015)이 찾으면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한번 보자고 하더라고요. ‘네 그림은 이상하게 고향(독일어로 하이마트)을 생각나게 한다’면서요.” 전시회장에서 한 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그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이가 많았다.

바젤(스위스)=김보라 기자

◆ 김민정 작가에 대한 상세한 기사는 27일 발간되는 ‘아르떼’ 매거진 2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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