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인데 5억이면 입주?…"지금 신청해도 5년 걸려요" [집코노미-집 100세 시대]

입력 2024-07-04 11:16   수정 2024-07-04 11:24



지난 3일 서울 강남구 자곡동에 있는 실버복지주택 '더 시그넘 하우스'를 찾았다. 평일 오전 시간인데도 로비는 고연령 입주자로 북적였다. 여성 고령자 두 명이 바둑을 두고 있었고, 다른 고령자도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부는 비 내리는 정원을 감상하며 음악을 듣기도 했다. 이날 방문 전까지만 해도 다른 실버복지주택처럼 고요하고 적막한 모습을 상상했다. 실제론 시끌벅적한 어르신의 웃음소리에 '고령자끼리만 있어도 이렇게 사람 사는 느낌이 들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 드문 강남지역 실버주택에 '입실률 100%'
더 시그넘 하우스는 서울에서도 보기 드문 강남권 실버주택이다. 총 169실 중 입실률은 95%로 높다. 단지 관계자는 "20~30가구가 입주하거나 나가면서 생긴 일시적 공실이지 실제론 공실이 없다. 100% 입실로 봐도 무방하다"고 했다.

인기 비결은 입지였다. 서울 강남 업무지구의 중심인 강남역까지 차로 30분 거리에 있어 접근성이 매우 좋다. 여기에 강남권 내에서도 몇군데 안 되는 넉넉한 녹지를 갖춘 대모산 자락에 있다. 도심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연중 산의 정취와 녹음, 맑은 공기를 즐기며 지낼 수 있다는 점이 고령층 선호 이유라는 설명이다. 이기동 더 시그넘 하우스 운영총괄 부사장은 "전원형 단지는 공기는 좋지만 지방이나 외진 곳에 있어 가족이 방문하기 어렵지만, 이곳은 주말마다 자녀 등이 찾아 식당과 게스트룸이 항상 북적인다"며 "어르신도 애초에 가족과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이곳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입주 예정일 기준 만 60세 이상이면 자격이 된다. 부부라면 한 명만 만 60세 이상이면 된다. 하지만 실제 진입장벽은 다소 높은 수준이다. 169가구 중 72가구로 가장 많은 전용 52㎡를 기준으로 보증금은 5억6000~6억4000만원이다. 월 생활비는 독신 기준 233만원, 부부라면 325만원을 내야 한다. 월 생활비엔 직원 인건비, 공용시설 유지비, 소모품비, 가구별 청소비에 월 60식의 식사비가 포함된다.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예상외로 대기자가 많다. 예약금을 1000만원씩 내야 대기 순번을 받을 수 있는데도, 입실을 기다리는 대기자만 120명이다. 인기 있는 구조나 조망이 좋은 방은 4~5년을, 선호도가 떨어지는 방은 1~2년을 기다려야 입주할 수 있다는 게 관계자 설명이다. 한번 들어오면 나가려는 고령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에 2017년 입주 시작 당시 계약기간을 두지 않기로 했던 것에서 최근 4년 계약으로 바꿨다.
우연한 기회에 얻은 강남땅 '실버주택'으로 변신
강남권은 통상 어느 지역이든 땅값이 비쌀 텐데 어떻게 이곳에 실버복지주택을 짓게 됐을까. 우연한 기회였다. 더 시그넘 하우스를 지은 박세훈 엘티에스 회장은 원불교 교인으로서 평소 종교활동을 통해 사회봉사와 기부 활동을 많이 해왔다. 하루는 원불교 교당 터를 구입하고자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방문했는데, 때마침 자곡동에 6181㎡ 규모의 노인복지시설용 땅(노유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박 회장은 '원불교 재단이 이 땅을 구입해 노인복지시설을 운영하면 좋겠다' 싶어 계약금을 대납했다. 이후 원불교 재단이 사정상 포기하는 바람에 부지를 박 회장이 그대로 떠안게 됐다.

더 시그넘 하우스를 짓기 전 박 회장은 '실버세대 천국'이라 불리는 일본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 유명하다고 소문난 일본 실버복지주택 수십 곳을 직접 답사하고 장단점과 특징을 기록해 왔다. '실버주택=복지사업=적자'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사업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2017년 그렇게 문을 연 더 시그넘 하우스는 적자경영 상태인 여타 실버복지주택과 달리 지난해 작은 규모지만 영업 이익을 거뒀다. 이 부사장은 "사업적 가능성을 보고 국내 여러 대기업 관계자도 방문해 운영 노하우를 묻고 가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그 덕에 올해 초 인천 청라국제도시에도 '더 시그넘 하우스 청라'가 새로 문을 열었다.

'중증 있는 고령자'도 함께 보듬는 통합 시설
박 회장이 일본 방문 당시 느꼈던 것 중 하나는 실버복지주택 상당수가 전문 요양센터를 같은 공간에서 함께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를 벤치마킹해 만든 곳이 더 시그넘 하우스 내 '너싱 홈'이다. 너싱 홈은 치매, 중풍 등 만성질환을 가진 중증 고령자에게 간호·간병·재활치료 서비스가 제공되는 전문 요양시설이다. 전체 230실 가운데 실버복지주택 170실을 제외한 60실을 너싱홈으로 운영 중이다. 이날도 치매를 겪고 있는 고령 여성 한 명이 물리 치료사와 작업 치료사의 개인 맞춤형 기능 회복 훈련받고 있었다. 같은 건물에 있어 로비에서 물리치료실까지 불과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요양센터가 실버복지주택 단지 인근에 따로 있는 경우는 있지만 아예 한 건물에 함께 있는 곳은 국내에 이곳이 처음이라는 게 시설 관리자의 설명이다. 건강한 고령 입주자가 갑자기 거동이 불편해지거나 치매 증상이 오더라도 다른 요양시설로 옮기기 전 곧바로 '너싱 홈'에서 관리를 받으며 그대로 지낼 수 있다. 이 부사장은 "부부가 같이 입주했는데 남편이 건강 악화로 너싱 홈으로 옮겼다"며 "한 건물에 있으니 아내가 매일 아침 너싱홈으로 문안을 온다"고 말했다.



남녀 사우나는 물론 탁구장, 헬스센터, 영화관, 안마의자, 노래방, 당구장, 서예실, 명상실, 작은 도서관까지 고급 리조트에서나 볼 수 있는 시설도 갖추고 있다. 그중에서도 도서관 운영은 흥미로웠다. 집에 장서를 보유하신 어르신이 입주하면서 처분하기 힘든 책을 이곳 도서관에 기증한 뒤, 마치 개인 서재처럼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구조다. 시설 관계자는 "시설에서는 추가로 책을 구매하지 않아도 되고, 입주자도 집에서 읽던 책을 그대로 읽을 수 있고, 또 가구별로 별도의 서재나 책을 둘 공간을 마련하지 않아도 돼 1석 3조 효과를 낸다"고 설명했다.

수서역까지 8분, 병원행 셔틀버스도 운영
노인복지주택의 핵심 중 하나는 3차 병원으로 불리는 대학병원까지의 접근성이다. 더 시그넘 하우스에서 차를 몰고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인 삼성서울병원까지 가봤다.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도 17분 만에 도착했다. 서울아산병원이나 강남세브란스병원도 30분 내 다녀올 수 있었다.

지방 접근성도 좋은 편이었다. 마찬가지로 차를 타고 SRT 수서역까지 가봤는데 8분이 소요됐다. 하지만 이곳 입주 고령자들의 평균 연령은 85세로, 90세가 넘는 입주자도 있었다. 운전하기 어려운 연령대다. 더 시그넘 하우스는 입주자에게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1시간에 한 대씩 단지에서 수서역과 삼성서울병원 앞까지 왕복하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거주 중인 고령자들은 물론 지방에 거주 중인 가족들까지도 셔틀버스로 쉽게 단지에 오갈 수 있다.



입주자가 방 구조만큼이나 중요시하는 요소가 또 있었다. 바로 식사다. 더 시그넘 하우스 관계자는 "방과 더불어 입주 고령자들이 입주 전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바로 밥"이라고 전했다. 이날 운 좋게 점심시간이 겹쳐 어르신들과 똑같은 식사를 해볼 수 있었다. 1식에 1만1000원임에도 가짓수가 많았고 고령자에게 맞춰 저염식으로 제공됐다.

저렴하게 노유지를 매입해 지어진 만큼 풀리지 않는 제약도 있었다. 노인복지주택 등 노인 의료복지시설로 등록된 노유지에선 임대사업 등을 할 수 없어 내부에 1차 병원이나 의료기관을 유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한계를 더 시그넘 하우스는 지역사회와의 연계로 풀어냈다. 인근 1차 병원 원장이 매일 아침 무료로 왕진해 너싱홈에 거주 중인 중증 고령자를 진료해주고 있다.
내년 65세 인구가 전 국민의 20%를 웃도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합니다. 은퇴한 시니어 세대에게 건강과 주거가 핵심 이슈입니다. ‘집 100세 시대’는 노후를 안락하고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주택 솔루션을 탐구합니다. 매주 목요일 집코노미 플랫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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