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본 도쿄를 방문한다면 어렵지 않게 벨에포크 시기의 미술을 만나볼 수 있다.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는 ‘트리오: 파리, 도쿄, 오사카의 모던 아트 컬렉션’이 열리고 있다. 국립서양미술관에서도 19세기와 20세기 초 제작된 서양 회화와 조각을 볼 수 있다. 일본에 가면 서양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을 볼 기회가 많은데, 이는 벨에포크 시대부터 버블경제 시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프랑스 미술을 열심히 수집해 온 덕이다. 일본과 프랑스, 두 나라가 공유한 아름다운 시절은 어땠을까.
‘트리오: 파리, 도쿄, 오사카의 모던 아트 컬렉션’은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오사카 나카노시마미술관, 파리 시립미술관의 근대미술 컬렉션 150여 점을 선보인다. 지난 5월 21일 개막해 8월 25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도시와 사람들’ ‘광고와 모던 걸’ ‘도시의 산책자’ 등 공통 키워드 34개로 구성됐다. 예를 들어 ‘모델의 파워’라는 주제에서는 모딜리아니, 마티스 그리고 일본 작가 요로즈 데쓰고로의 작품을 비교해 소개한다. 20세기 초부터 오늘날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세 미술관이 소장한 서양과 일본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전시다.
이 전시를 주최한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은 1952년 설립됐다. 일본에서 소장품 수집을 처음으로 시작한 미술관이자 일본과 서양 근현대미술의 방대한 컬렉션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소장품 중에는 벨에포크 시기 서양 거장들의 작품도 포함돼 있다. 오사카 나카노시마미술관은 2022년 문을 연 신생 미술관이다. 개관 이후 소장품이 포함된 모딜리아니 전시를 시작으로 ‘툴루즈 로트렉과 무하의 파리에서의 10년’ ‘클로드 모네: 연작 회화로의 여정’ 등 벨에포크 시기 주요 작가들의 전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두 미술관의 사례를 보면 일본 미술관들은 설립 시기와 관계없이 잘 알려진 서양 근대미술품을 소장한 경우가 많고 관련 전시 역시 자주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립서양미술관은 중세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서양미술 작품만을 소장, 전시한다. 이 미술관은 사업가인 마쓰카타 고지로가 20세기 초 유럽에서 직접 수집한 서양의 회화, 조각, 가구를 기증한 것에서 시작됐다. 마쓰카타가 1만여 점에 이르는 작품을 파리에 보관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프랑스 정부는 그의 소장품을 적국 자산으로 분류해 압류한다. 종전 후 일본과 프랑스의 관계 개선을 위해 프랑스 정부가 이 컬렉션의 일부를 반환했고, 이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1959년 국립서양미술관이 건립됐다. 마쓰카타의 컬렉션 370점에서 시작된 국립서양미술관의 현재 소장품은 6000여 점에 달한다.
20세기 초 파리에는 마쓰카타와 같은 컬렉터뿐 아니라 일본인 작가가 300여 명 유학하고 있었다. 일본 미술가들의 파리 유학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됐고,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급감했다가 1920년대에 들어 다시 급증했다. 1927년에는 프랑스에 거주하던 일본인 사업가 사쓰마 지로하치가 파리대에 일본관(Maison de Japan)을 건립해 기부하고, 일본과 프랑스의 국제 교류 및 유학생 후원을 주도하기도 했다. 20세기 초부터 프랑스와 일본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된 셈이다.
20세기 초 파리에 이처럼 일본인 예술가와 컬렉터가 많았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당대 파리가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미술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벨에포크 시기의 미술은 프랑스 출신 예술가들과 더불어 세계에서 모여든 외국인 예술가를 지칭하는 에콜 드 파리가 함께 만들어낸 산물이다.
19세기 말부터 일본풍을 뜻하는 자포니즘의 인기가 드높았던 것도 일본과 프랑스의 교류가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1867년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프랑스 예술가와 미술 애호가들이 처음 일본 미술을 접한다. 일본 미술의 이국적인 면모, 간결하고 단순한 외형 그러면서도 장식적이고 화려한 요소는 일본 미술에 대한 폭발적 관심으로 이어졌고, 일본 미술을 모방하거나 수집하는 분위기가 확산했다. 반 고흐가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를 거의 모사하듯 그린 작품들은 자포니즘의 대표적인 예 중 하나다. 모네 역시 기모노를 입은 부인의 초상을 그리는 등 자포니즘에 대한 열광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대표적 작가다.
자포니즘이 미술의 중심지 파리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했고 서양 미술가들에게도 영향을 줬다는 사실은 버블경제 시기 일본 컬렉터들이 값비싼 인상주의 미술을 앞다퉈 사들이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버블경제 시기 일본인들이 서양 명화를 구입하는 데 들인 돈이 원화로 9조원에 달한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도 존재한다. 비공식적인 구매까지 더하면 금액이 세 배 이상이라는 설도 파다하다.
1990년에는 다이쇼와제지 회장이던 사이토 료헤이가 고흐의 대표작 ‘가셰 박사의 초상’과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를 사들이는 데 2000억원 가까운 돈을 지급했다. 사이토는 자신의 사후에 이 작품들을 같이 화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가 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들끓자 유언을 철회하는 ‘웃픈’(웃기고도 슬픈) 해프닝도 있었다. 벨에포크 시기의 명화를 구입하는 데 엄청난 돈을 기꺼이 지급할 수 있었던 사이토 회장의 아름다운 시절은 그가 1993년 뇌물 공여 혐의로 구속되고 3년 뒤 사망하면서 끝을 맺었다. 일본의 버블경제 시기가 막을 내린 것도 이즈음이다.
20세기 초 자포니즘은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했고, 일본 컬렉터들은 이 시기에 파리에 머물며 벨에포크 시기 미술품을 수집했다. 아름다운 이 시절의 추억을 반추하듯 버블경제 시기 일본 컬렉터들은 인상주의 미술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이때 구입한 미술품 중 일부는 일본 내 여러 미술관의 소장품이 되기도 했다. 일본 미술관을 방문해 서양 명화들을 접하게 된다면 프랑스와 일본이 공유한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리며 작품을 감상해봐도 좋을 것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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