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스턴베리는 단순한 음악 축제가 아닙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문화기관이죠.”(힙합 래퍼 제이지)
매년 6월 말이 되면 인구가 8000명뿐인 영국 남서부의 작은 농장마을이 20만 명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인종도 국가도 종교도 모두 다른 이들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다. 음악과 예술을 즐기는 것. 올해로 54주년을 맞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음악 페스티벌,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의 얘기다.
글래스턴베리는 록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버킷리스트에 품고 있는 곳이다. 데이비드 보위를 비롯해 롤링스톤스, 오아시스 등 전설적인 록스타뿐만 아니라 폴 매카트니, 스티비 원더, 비욘세, 아델 등 세계적 팝 아티스트가 두루 찾아 잊지 못할 무대를 만들어왔다. “글래스턴베리는 아티스트를 한계까지 밀어붙여 다른 차원의 퍼포먼스를 구현해 내도록 한다”는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말처럼 20만 명의 관중이 환호하는 장면은 수천, 수만 번 공연해온 아티스트들에게도 경이로움 그 자체다.
올해 글래스턴베리의 헤드라이너는 콜드플레이를 비롯해 팝 가수 두아 리파와 R&B 가수 SZA가 장식했다. 올해는 다양한 한국인 아티스트들이 메인 무대에 등장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이돌그룹 세븐틴은 K팝 아티스트 최초로 메인 무대에 서며 K팝의 열기를 실감하게 했다. 얼터너티브 K팝 그룹 바밍타이거도 서브 스테이지에 올라 관객들을 뜨겁게 달궜다.
글래스턴베리는 헤드라이너가 발표되기 4개월 전 60만원(360파운드)짜리 티켓을 판매한다. 환불은 공연 한 달 전까지만 가능하고 양도도 불가능하다. ‘누가 무대에 서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준비된 21만 장의 티켓은 전 세계에서 약 100만 명이 경쟁을 벌인 끝에 한 시간 만에 완전히 동이 났다. 지난달 26일부터 4박5일간 지구상 가장 뜨거웠던 글래스턴베리 축제 현장의 이야기를 전한다. 지상 최대 낙(Rock)원의 초대다.
무대 뜨겁게 달군 화제의 공연
여름에 열리는 ‘록 페스티벌’ 하면 모두가 떠올릴 이미지다. 그 이미지를 만든 원조 격 페스티벌을 들라면 전 세계인들이 가장 먼저 영국의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이하 글래스턴베리)을 꼽는다. 세계 최대 규모 음악 축제 글래스턴베리가 지난달 30일 4박5일의 대장정을 마쳤다. 21만 명의 관중이 만든 광란의 축제장에 한 명의 관객으로 참여했다.
4박5일간 잠들지 않는 100개의 무대
영국 남서부 서머싯주 필턴에서 열린 글래스턴베리는 음악팬이라면 누구나 인생의 버킷리스트로 꼽는 페스티벌이다. 전설의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가 별세한 다음 날인 1970년 9월 19일 처음 개최돼 올해로 54주년을 맞았다. 낙농업자인 마이클 이비스가 자신의 농장에 좋아하는 아티스트 10명을 섭외하고 관중 1500명을 동원한 게 시작이다. 그 작은 아이디어는 매년 4박5일간 3000여 팀이 공연하고 21만 명이 참가하는 글로벌 메가 이벤트로 발전했다.
텐트촌을 포함한 행사장은 여의도 면적(2.9㎢)의 두 배(6㎢)다. 이 부지에 메인 격 무대만 5개, 이를 포함한 공식 무대는 총 85개다. 예고 없이 지어지는 작은 무대까지 합하면 총 100개 남짓한 무대가 설치된다. 4박5일간 오전 10시 무렵부터 새벽 5시까지 3500여 개의 공연과 부대행사가 열린다. 수많은 무대 중 단연 압권은 메인 무대인 피라미드 스테이지다. 10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부지에 성인 남성 키의 다섯 배쯤 되는 대형 스피커만 15개 설치됐다. 금요일 이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두아 리파는 “이 스테이지에 서길 열망했고 언젠가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며 “여기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소감을 전하다 북받치는 감정에 말을 더 잇지 못하기도 했다.
글래스턴베리의 왕좌 차지한 콜드플레이
올해 피라미드 스테이지의 진정한 왕은 콜드플레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콜드플레이는 올해로 글래스턴베리 헤드라이너 무대에 다섯 번 선 유일한 아티스트가 됐다. 신선함이 떨어진다고 불평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전체 관객의 절반인 10만여 명이 콜드플레이 공연에 몰려들어 다른 스테이지로 가는 골목까지 인파로 가득 찼다. ‘옐로(Yellow)’가 연주되자 관객들이 찬 발광팔찌가 노랗게 변해 현장이 노란 바다로 물들었고,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가 나올 땐 떼창 소리에 온몸의 감각이 깨어났다. 콜드플레이는 BTS와의 협업곡 ‘마이 유니버스(My Universe)’의 한국어 가사를 직접 부르고 관객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한국말로 인사해 한국인 관객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콜드플레이가 한국어를 연발한 건 글래스턴베리의 변화와도 연관이 있다. 최근 몇 년간 글래스턴베리는 지나치게 백인 남성 아티스트 위주로 라인업을 짠다는 비판에 시달려왔다. 이를 의식한 듯 올해는 헤드라이너 셋 중 둘을 여성 아티스트로, 그리고 그중 한 명을 흑인 아티스트로 배치했다. 장르도 다양해졌다. 2008년 힙합 가수 제이지를 헤드라이너로 세웠다가 ‘록페스티벌에 웬 힙합이냐’는 반발에 부딪혔던 글래스턴베리지만, 이제는 헤드라이너 셋 중 한 명만이 록스타다.
“22년 걸렸다” 에이브릴 라빈에서 신디 로퍼까지
올해는 여성 아티스트들의 약진이 특히 돋보였다. 정상급 여성 흑인 힙합가수 리틀심즈, 왁스가 ‘오빠’로 번안한 곡 ‘쉬 밥(She bop)’의 원곡자이자 여성인권 운동가로도 유명한 신디 로퍼 등이 피라미드 스테이지에 올랐다.
가장 반응이 좋았던 여성 아티스트는 서브스테이지인 아더스테이지에 선 캐나다 싱어송라이터 에이브릴 라빈이었다. 몰려든 사람이 너무 많아 우회로를 20분가량 돌아야만 무대에 진입할 수 있었다. 17세에 발매한 팝 펑크곡 ‘컴플리케이티드(Complicated)’를 열창하며 “이곳에 오기까지 22년 걸렸다”고 말한 그는 ‘걸프렌드(Girlfriend)’ 등 히트곡 메들리를 펼친 뒤 ‘스케이터 보이(Sk8er Boi)’로 종지부를 찍었다. K팝 그룹과 한국 아티스트도 성공적인 무대를 마쳤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글래스턴베리가 K팝 그룹을 처음으로 피라미드 스테이지에 올렸고, 세븐틴이 그 무대를 차지했다.
글래스턴베리 100% 즐기는 법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에서 공연만 보다 온다면 절반도 즐기지 못한 것이다.’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의 본 행사는 주말을 끼고 3일간이지만 앞서 수요일과 목요일 이틀간 전야제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일본의 후지록페스티벌 비롯해 전 세계 음악 페스티벌에서 열리는 전야제가 하루뿐인 것과 대조적이다. 이 전야제에선 공식 공연이 하나도 열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전체 관객의 절반 정도가 수요일부터 글래스턴베리에 참가한다.
아침엔 에어로빅 점심엔 라틴댄스
올해 글래스턴베리 메인 무대에 가장 먼저 오른 사람은 누구일까. 록 밴드? 아니면 팝 스타? 둘 다 틀렸다. 정답은 피트니스 코치다. 목요일 오전 10시 글래스턴베리 메인 무대 중 하나인 파크스테이지엔 유명 피트니스 코치 조 윅스가 올랐다. 그는 퀸의 ‘돈 스톱 미 나우(Don’t stop me now)’, 콜드플레이의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 등 노래에 맞춰 관객과 제자리 뛰기 등을 함께했다. 에어로빅과 비슷한 운동. 야외 페스티벌이 ‘결국은 체력전’이라는 걸 아는 자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따라 했다. 30분간 수백 명의 관객은 그의 구령에 맞춰 가볍게 숨이 찰 정도로 체조하고 사흘간 이어질 공연을 즐길 준비를 마쳤다.
‘글라스토 라티노’라는 텐트에서는 공연 기간 살사댄스와 삼바댄스를 배우는 클래스가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 단위로 번갈아 열렸다. 단상에 올라간 코치는 한 번도 살사와 삼바를 춰 보지 않은 사람도 따라 할 수 있도록 스텝 밟는 순서 등을 천천히 알려준다. 라티노 텐트에선 오후 7시부터 카니발이 열리는데, 관객들은 라틴 음악에 맞춰 그날 배운 라틴 댄스를 맘껏 뽐냈다.
글래스턴베리에선 새벽 5시까지 유명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 아티스트가 공연하는 무대가 수십 곳이다. 무대 여럿을 돌아다니며 즐기다 보면 이튿날 컨디션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새벽까지의 음주 가무로 피로한 관객들이 향하는 곳이 있었으니, 행사 기간 매일 오전 8시부터 문을 여는 ‘힐링필드’ 구역이다. 여기에선 요가 클래스가 열린다. ‘이효리 요가’로 널리 알려진 하타 요가를 비롯해 다양한 요가 클래스가 한 시간 단위로 진행된다. 모처럼 바람 소리를 들으며 지친 심신을 안정시키는 명상의 장소.
윤전기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신문
글래스턴베리에선 모랫바닥에 앉아 신문을 읽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이 읽고 있는 신문은 글래스턴베리 행사 기간에만 운영하는 자체 신문사 ‘글래스턴베리 프리 프레스’가 찍어낸 것이다. 축제 기간 목요일 아침과 일요일 아침 딱 두 차례, 4쪽짜리 신문을 발행한다. 1957년 제작된 7t짜리 윤전기는 행사 기간 볼 만한 공연과 관련 인터뷰 등이 적힌 기사를 바쁘게 찍어낸다. 인쇄소에 방문하면 신문이 인쇄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매일 3만 부가량의 신문이 배부되는데 오후 6시가 되기도 전에 모두 동난다. 신문을 통해 올해 축제 정보를 쉽게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훗날 글래스턴베리를 추억하는 굿즈가 되기 때문이다. 올해 목요일판 신문에는 글래스턴베리 개최자이자 낙농업자인 마이클 이비스의 단독 인터뷰, 영국 공영방송 BBC의 간판 앵커이자 아마추어 DJ인 로스 앳킨스 이야기가 실렸다.
축제 장소의 땅 주인은 젖소였어!
글래스턴베리는 여의도 면적의 두 배 크기(6㎢) 목장에서 열린다. 행사 기간 500마리의 젖소는 잠시 행사장 바깥으로 옮겨진다. 행사 기간에도 그 젖소들의 흔적을 찾아볼 방법이 있다. 행사장 곳곳에 그 소에서 짠 우유를 파는 부스가 마련돼 있어서다. 이 우유는 초회 글래스턴베리부터 관객과 함께한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우유는 저지방으로 쿰쿰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다소 가벼운 맛을 띤다. 허기질 때마다 신선한 우유를 들이켜며 다시 무대 앞으로 향했다.
할리우드 스타 총출동
지난달 30일 영국 서머싯주 필턴에서 열린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 둥근 천막 텐트 안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눕거나 앉아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이어 밥 딜런 이야기를 다룬 토드 헤인스 감독의 영화 ‘아임 낫 데어’가 상영됐다. 영화가 끝나자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연단에 섰다. 블란쳇은 30분간 관객들의 질문을 받고 답했으며 ‘반지의 제왕’ 속편에서 갈라드리엘로 곧 돌아올 것이라는 힌트를 남기기도 했다.
‘필턴 팔레(PILTON PALAIS)’라는 이름이 붙은 이 텐트에선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이 개최되는 5일 동안 작은 영화제가 열린다. 처음엔 부모와 함께 글래스턴베리를 찾은 아이를 위해 아동용 상영관으로 문을 열었는데 지금은 모든 연령대를 위한 영화가 걸린다.
올해는 총 30개 영화가 이곳에서 관객을 만났다. 최근 개봉작인 ‘인사이드 아웃 2’와 ‘퓨리오사’뿐 아니라 1922년 만들어진 무성영화 ‘노스페라투’도 상영됐다. 틸다 스윈턴이 공동 프로듀서로서 텐트 상영관에 걸 영화를 고르고 배우를 섭외하는 데 참여한다. 스윈턴은 영화제 기간 내내 스태프와 함께 필턴 팔레 옆에 마련된 텐트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올해는 13개 작품이 배우와 감독 등이 참여하는 GV 행사로 꾸려졌다. 그중 인기를 끈 GV는 앤드루 헤이그 감독의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였다. 샬럿 웰스 감독의 ‘애프터선’에서 아빠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긴 폴 메스칼과 드라마 ‘셜록’에서 짐 모리어티 역할로 이름을 알린 앤드루 스콧이 참석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듄: 파트2’도 올해 인기를 끈 작품 중 하나다. 작품에서 황제의 딸로 열연한 플로렌스 퓨가 GV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윈턴도 영화 ‘프라블러미스타’ 상영에 앞서 직접 영화를 소개하러 단상에 오르거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GV에 참석해 관객들의 질문을 받았다.
글래스턴베리(영국)=이슬기 기자 surug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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