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7월 10일 10:34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기후 공습…빨라진 블랙아웃 공포”, “기업들 ‘전력이 곧 리스크’ 조업시간 조정하고 자가발전 안간힘”, “원전이든 뭐든 당장 지어야”, “바이든 대 트럼프, 누가 당선돼도 전력·인프라 주는 뜬다”, “전력망 손보는 미국 20년 공급 계획 세운다”, “인공지능(AI)발 전력 확보 전쟁에 천연가스 가격 고공행진”, “전기 없인 챗GPT도 없다…전력과 에너지로 번진 AI 열풍”, “국경 없는 친환경 전력망…모로코의 태양광 전기 영국에서 쓴다”. 최근 경제지를 장식했던 뉴스입니다.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고 고루해 보이던 전력이 난데없이 주식시장을 흔들었습니다. 한동안 반도체 등 AI 관련 분야가 뜨거웠습니다만 이제 전력과 에너지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동의 중심에는 빅테크들이 있습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클라우드 컴퓨팅 세계를 지배하는 알파벳,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들의 지난 1분기 투자액이 400억 달러로 대부분 데이터센터에 들어갔습니다. AI의 자양분인 데이터를 처리하려면 엄청난 전력이 필요합니다.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량은 챗GPT 등장 이후 더욱 폭증하였습니다. 각종 음성과 이미지를 인식하고 처리하는 챗GPT는 구글 같은 텍스트 처리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전력을 먹어 치웁니다. 전력 확보 대란은 만물의 전기화로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빅테크들은 전력업계와 공조하며 풍력과 태양광 발전소 건설에 나서고 있습니다. 신재생에너지의 안정성을 개선하기 위해 마이크로그리드와 배터리, 첨단 소프트웨어 기술도 업그레이드하고 있습니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는 신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을 대비한다며 원전까지 손을 대고 있습니다. 구글은 지열 프로젝트에 나서고 있습니다. 챗GPT의 창시자 샘 알트만은 핵 융합과 태양광 모듈 스타트업 투자에 나서고 있습니다.
전력 확보 비상은 빅테크들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은 원전이든 석탄이든 가스이든 불문하고 발전소 건설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상기후 확산과 노후화된 전력망 때문입니다. 수력발전에 전력의 75퍼센트를 의존하는 에콰도르는 가뭄과 고온, 송전망 낙후로 20년 만에 블랙아웃 되었습니다. 대만에서는 전력망 노후화로 엔비디아와 폭스콘 등 수천여 개 기업이 있는 과학단지가 정전되었고, 이제 반도체업체 TSMC까지 흔들릴까 우려합니다. 지난해 대규모 전력 부족 사태를 겪은 베트남에서는 폭스콘이 전력 사용을 30퍼센트 줄여야 할 상황입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 등으로 세계 각국의 제조기업을 끌어들이며 전력 공급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원전을 멀리했던 호주는 다시 원전을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인도는 역대 최대 규모의 석탄발전소 증설을 추진합니다.
바야흐로 전력을 두고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와 AI라는 두 빌런이 이 전쟁을 더욱 격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친환경 선도자라는 빅테크들이 석탄과 가스 등 화석연료로 생산된 전력까지 동원하며 온실가스를 늘리고 있습니다. 작년에 구글은 온실가스 배출량이 13퍼센트 늘며 2019년에 비해 무려 50퍼센트가량 늘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2020년 이후 30퍼센트 늘었습니다. 이런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빌 게이츠는 AI가 결국 전력 사용량을 끌어내릴 것이고 빅테크들이 새로운 동력원을 찾으면서 청정에너지 개발과 보급을 촉진할 것이라고 방어합니다.
이처럼 전력 대란에 대응한다며 기업과 정부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에너지를 동원한다는 현실은 수긍이 갑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장기적으로는 흐름이 분명해 보입니다. 옥스포드대학교 연구진은 2040년이 되면 에너지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고착화되고, 2060년에는 태양광·풍력·그린수소 등이 화석연료를 밀어낼 것으로 내다봅니다. 이코노미스트는 미래 에너지 시장의 주인공은 태양광이라고 단언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태양광 발전 용량이 열 배로 증가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2040년대에는 태양광이 모든 에너지를 통틀어 최대 에너지원이 됩니다. 여기에는 태양광 생태계의 선순환이 작동합니다. 태양광 전력 생산량이 증가하면 단위당 비용이 감소하고, 그에 따라 수요가 증가하면 생산량이 증가하고, 다시 비용이 감소하고 수요가 증가합니다. 그리고 지구촌에는 반도체에 필요한 실리콘이 함유된 모래와 햇볕이 넘칩니다. 물론 인간의 상상력도 무한합니다.
태양광의 뒤를 따르는 주자는 풍력으로, 이제 육상풍력에서 해상풍력으로 중심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드넓은 바다의 풍부한 바람, 대규모 단지 개발 용이성, 낮은 환경 영향, 발전원 중 가장 높은 고용 창출 효과 때문입니다. 10년 후 해상풍력 발전 용량은 지금의 네 배 수준으로 커집니다만 태양광에 비하면 증가 속도가 한참 뒤집니다. 이는 사업 초기의 엄청난 규모의 투자와 20년 이상의 투자 회수 기간 등 고도의 금융과 엔지니어링 리스크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 유럽이 주도하는 심해용 발전 기술과 탄소섬유 기반의 터빈 대형화 기술로 인하여 고부가가치 해상풍력 발전은 더 확대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석유공룡들도 신재생에너지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영국의 BP와 셸(Shell)은 이미 태양광·풍력 발전기를 돌리고 있고, 미국의 엑슨모빌(ExxonMobil)은 리튬 광산에 베팅하고 있습니다. 특히 SK온에 리튬을 공급하기로 한 엑슨모빌은 석유를 추출하여 정제하는 기술을 리튬에 십분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석유공룡들의 변신은 IEA가 석유 과잉생산을 경고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IEA는 전기차 확산과 친환경 대체에너지 확대로 석유 생산량이 2029년 정점을 찍은 후 내리막세로 돌아설 것으로 전망합니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2030년 세계는 넘치는 석유에 수영하고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재생에너지 산업은 유럽과 중국, 미국이 주도합니다. 이 지역은 단일 시장으로서 천혜자원과 생산, 유통까지 생태계 전반이 연결되면서 엄청난 규모의 가치 창출이 가능합니다. 유럽은 오래 전부터 국경을 초월한 대대적인 에너지 산업 구조조정을 마치고 이제 세계 해상풍력 시장의 질서를 재편하고자 합니다. 세계 전기차 시장을 주도하고 AI까지 미국을 위협하는 중국은 태양광·풍력 모두 자국 시장만으로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문제는 미국입니다. 바이든 정부는 청정에너지 생태계 구축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돌아오면 화석연료 에너지가 득세합니다. 이런 미국도 전력 시장만큼은 장밋빛입니다. 바이든과 트럼프 중 누가 집권하든 ‘리쇼어링’ 신봉자로 제조업을 뒷받침하고 합니다. 트럼프 캠프는 10개의 ‘자유도시(freedom city)’ 건설을 공약하며 전력 인프라 업계를 들뜨게 합니다. 바이든 정부의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는 최근 친환경 전기화,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 수요에 대비하기 위해 전력망 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습니다.
이런 전력 대변환의 시기에 한국 기업들은 고민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지구촌 주민에게 필요한 무엇이든 해외에서 원자재를 들여와 전력을 돌려 제품을 만들어 다시 해외에 내다팔아야 하는 기업들은 생존의 기로에 있습니다. 전력 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과 중국,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척박한 생태계에서 내부적으로도 상황이 녹록치 않습니다. 더군다나 10퍼센트도 채 되지 않은 신재생에너지 산업은 OECD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칫하면 세계 에너지 생태계에서 갈라파고스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2011년 9월 15일 대정전의 악몽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엘리베이터와공장이 멈추고 금융기관 업무가 중단되고 도로 신호등까지 꺼졌습니다. 올해에는 더 빨라진 폭염으로 비상이 걸렸습니다. 이 같은 현실은 어떻게든 극복이 가능하겠지만 미래가 더 문제입니다. AI 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수도권의 반도체 메가클러스터는 전력이 가장 큰 리스크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비효율적인 행정절차, 지역 갈등, 송전망 부족 등 여러 이유가 얽혀 있습니다. 특히 13년 전 대규모 블랙아웃 이후 최후의 석탄발전소로 건설된 삼척블루파워가 놀고 있는 이유는 송전망 때문입니다. 발전소와 송전망은 사람의 심장과 혈관과 같습니다. 화석연료이든 원자력이든 풍력이든 발전소는 송전망이 없으면 고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한전은 200조원이 넘는 누적 적자로 송전망을 건설할 힘이 없습니다.
과연 한국 기업들은 에너지 격변의 시기에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원자재 생산(업 스트림)과 제조(미들 스트림), 소비(다운 스트림) 세 가지 측면에서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풍력이 좋은 예입니다. 해상풍력의 리더인 북유럽은 바람이 풍부합니다. 한국은 풍력발전에 필요한 바람이 북유럽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북유럽은 철강·조선 등 중후장대한 산업 역량은 한국에 다소 밀립니다. 유럽은 전 지역이 연결됩니다. 덴마크에서 생산된 전력이 유럽 전역으로 공급되고 있고,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생산된 태양광 전기는 해저 송전망을 거쳐 영국으로 공급될 계획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생산된 전기를 이웃 나라와 공유하기 힘든 ‘고립된 섬’입니다. 한국·북한·중국·러시아·일본을 연결하는 ‘동북아 슈퍼그리드’ 구상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지정학적 상황에서는 꿈에 그칩니다.
에트 콘웨이의 ‘물질의 세계(Material World)’라는 책에 따르면 인류 문명은 모래·소금·철·구리·석유·리튬 6가지 물질을 바탕으로 진전되었습니다. 기후위기와 AI가 어우러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AI는 반도체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고, 반도체는 실리콘칩이 필요하고, 실리콘은 모래에서 나옵니다. 리튬이 없으면 2차전지와 재생에너지도 불가능합니다. ‘뉴 골드(new gold)’인 구리 역시 주인공입니다. 전기차는 화석연료차에 비해 구리가 네 배나 많이 들어갑니다. 구리 없는 송전망은 불가능합니다. 미래 에너지 생태계에서 리튬이 소화기라면 구리는 척추입니다. 이런 물질이 있기에 AI와 탈탄소화라는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해결책이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구촌은 전기차, 풍력발전 터빈, 태양광 패널이 더 필요하고 더 많은 자연의 물질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물질을 가공하여 시장에 내놓으려면 또다른 능력이 필요합니다.
결국 세계 에너지 시장에서 한국의 길은 미들 스트림에 있습니다. 오스테드는 세계 최대 해상풍력 발전단지의 위상을 중국과 한국, 일본, 인도에 내줄까 우려합니다. 특히 한국은 해상풍력 발전에 필수적인 철강·조선 등 중후장대 산업에서 강하다는 겁니다. 한국은 이 외에도 가진 게 많습니다. 삼성과 LG가 상용화를 추진하는 UPS 배터리도 있습니다. 삼성과 SK의 저전력 D램도 있습니다. 삼성, LG, SK는 고성능 반도체의 핵심인 유리기판 선점에 나서고 있습니다. 조용하게 분주한 기업들도 있습니다. 빅테크들의 데이터센터는 변압기가 필수적입니다. 고성능 변압기는 GE, 지멘스, 히타치 같은 대기업들이 지배합니다. 그리고 이들 글로벌 대기업에게 최상급 구리선을 공급하는 곳은 삼동 같은 숨은 기업들입니다. 이처럼 한국 기업들은 모레와 구리는 만들 수는 없지만 반도체와 배터리와 변압기 소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2차산업혁명은 인류 고유의 창의성과 과학문명의 산물인 전기로 촉발되었고, 전기는 천연의 화석연료로 생산되었습니다. 화석연료는 20세기 후반 인류에게 풍요를 안겼습니다. 21세기는 AI가 주도하는 디지털혁명 시대입니다. 하지만 AI 역시 전기 없이는 관념에 그칩니다. 그리고 기후위기 시대에 살고 인류는 신재생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이런 인류는 지구온난화가 멈추고, 생산성이 높아지며 여가시간이 늘고, 좀 더 살만한 ‘약속의 미래’를 고대합니다. 약속의 미래는 에너지가 들어가는 무엇이든 저렴해질 것입니다. 글로벌 사우스를 비롯한 낙후지역은 집을 밝히고 정화된 물을 마시고 이동도 편해질 것입니다. 어쩌면 AI가 탑재된 휴머노이드 로봇 덕분에 사람들은 좀 더 느긋한 삶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에이 아이(A.I.)'에서 세상은 지구온난화로 대부분의 도시가 잠겼지만 사람들은 과학문명 덕분에 ‘제한적이면서도 행복한’ 삶을 이어갑니다. 이런 삶에서 가장 충직한 조력자는 휴머노이드 로봇입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사랑의 능력이 프로그래밍 된 꼬마 로봇 데이빗은 인간에게 입양되나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버림받습니다. 데이빗은 인간이 되는 소원을 풀어준다는 파란 요정을 찾아 고난의 여정을 떠납니다. 그런데 데이빗의 소원은 인류가 절멸한 2천년 후에야 이루어집니다. 현재와 영화 속 미래는 기후위기와 AI라는 레시피가 공통적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영화 속 미래와 얼마나 닮아갈지는 전적으로 현재의 인간에게 달려있습니다.
<i>(본 글은 The Economist의 ‘Sun Machine: Solar power is going to be huge’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i>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