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기 학기를 합쳐 매년 수십 곳에 강사 원서를 내고 있는데도 붙질 못하네요. 이제 피아노를 시작했을 당시 저 자신에게 배신감마저 들어요."
미국 동부의 한 음대에서 피아노 석·박사 과정을 마친 채지윤(36)씨는 "재작년엔 예중, 예고까지 강사 원서만 거의 100장을 냈다"며 이같이 토로했다. 채씨는 귀국 후 3년째 마땅한 강사 자리를 구하지 못해 현재 서울 지역에서 개인 레슨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6년 동안 유학비로 3억원 이상 들었다. 그나마 장학금을 자주 받은 편이라 이 정도 비용"이라며 "강단에 서겠다는 마음으로 '피아노'에 인생을 갈아 넣었는데 근근이 레슨으로 생활비만 벌고 있으니 암담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교육계 전반이 심각한 저출생으로 신음하고 있지만, 이 가운데 특히 클래식 교육계가 더 큰 타격을 받는 모습이다. 고학력의 유학파 출신 인재는 넘쳐나는 반면 음악 전공을 희망하는 학생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고 있어서다.
수억원 소요되는 해외유학을 거치지 않고선 제대로 된 직업을 찾기 어려운 학문의 특성상 강의 자리를 구하지 못 할 경우 당사자들이 받는 심리적 박탈감은 다른 학문에 비해 훨씬 큰 게 클래식 음악계의 실상이다. 제대로 된 자리를 찾지 못 한 석·박사 학위 보유자들은 다른 생존 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다.
"몇억원 들여 공부하고 왔더니…"
해외 명문 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국내로 귀국한 유학파들은 강사 자리를 찾지 못할 경우 보통 개인 레슨을 통해 생활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레슨비는 사실상 동결 상태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고학력 강사가 레슨 시장에 이미 넘쳐나기 때문이다.특히 코로나19로 수강생이 감소했을 때 떨어진 레슨비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단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채씨는 "원래 음대 피아노과 입시생 기준 1시간 레슨비는 15만원 전후였다. 그런데 코로나19때 워낙 대면 수업을 꺼리니 12만~13만원으로 낮췄었다"며 "앤데믹 이후 학생 수는 거의 그대로인데 선생님만 많아져 지금까지도 그 가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20여년 전 입시 준비할 때도 입시 레슨비는 10만원대 초반이었다"며 "차라리 외국으로 나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고민된다"고 덧붙였다.
오스트리아 소재 명문 음대에서 바이올린 석사 과정을 밟은 박지호(41)씨도 "바이올린의 경우 거의 10년 가까이 1시간에 4만~5만원에서 오르질 않는다"며 "수업도 아이들에서 성인 취미반 중심으로 바뀌면서 수업수가 확 줄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국내파와 해외 유학파 간 레슨비 차이는 거의 없다"면서도 "다만, 대학 출강을 나갈 경우 수업료가 확 뛴다"고 말했다.
입시 학원 역시 경영이 녹록지 않다. 40대 유모 씨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8년째 음악학원 및 대학원 진학 전문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유씨는 "코로나 전까진 오후 2~8시까지 50분씩 진행되던 피아노 클래스가 대부분 다 찼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토막 난 상황"이라며 "작년엔 대학원생인 학원 강사 한 명을 내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쏟아지는 '고학력자'· 급감하는 '학생'
이 같은 현상은 고학력자가 넘쳐나는 반면 학생 수는 최근 급격히 감소해 발생한 '미스매치'가 핵심 요인으로 풀이된다.최근 몇 년 새 외국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귀국한 이들의 상당수는 1990년대 전후 출생자다. 이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불었던 '클래식 붐'을 겪은 세대다. 한국학원총연합회에 따르면 2000년대 중반 전국의 음악학원은 1만6000여개에 달할 정도로 클래식 학습 열기가 뜨거웠다.
그런데 이들이 유학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현업에 진출하려고 하는 지금, 저출생에 따라 음악 전공을 희망하는 학생수가 대폭 줄어든 것이다. 이런 추세로 인해 음대 입학 정원도 덩달아 감소하고 있다. 서울대 음대 입학정원(정원 내)은 2013년 153명에서 지난해 142명으로 점차 줄어 왔다. 이화여대 음대도 같은 기간 정원이 198명에서 164명으로 감소했다.
이준성 성신여대 음대 기악과 교수는 "앞으로 5~10년가량 더 지나면 상황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며 "지금 추세대로 유학파 전공자는 더 쏟아지고, 학생들은 더 줄어드는 괴리가 점차 더 커지면 특히 지방에 있는 클래식 계열 학과가 가장 먼저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각자도생 유학파도 늘어"
레슨으로만 버티기 어려운 경우 과거 같았으면 클래식 음악계에서 손가락질 받았을 '비정통'의 길을 찾는 유학파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클래식 기타를 전공한 30대 배모 씨는 예술 학교가 아닌 일반 초등학교 '방과 후 학교' 수업 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배씨는 "솔직히 처음엔 주변에 말하기 좀 민망하기도 했다"면서도 "다만 이제는 지방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이 출강하고 있다. 지난 학기엔 전북 지역 초등학교 두 곳에서도 수업을 맡았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돈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당장 현실을 살아야 하지 않나"라고 덧붙였다.
유튜브로 진출한 사례도 있다. 바이올린 전공자인 김비오(40)씨는 현재 구독자 4700여명을 보유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김씨는 "유학파들은 강사가 아니면 오케스트라의 전문 연주자가 되길 원하지만, 이 역시도 대부분 객원 멤버라 수입이 불규칙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찾은 돌파구가 유튜브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튜브를 통해 당장 엄청난 수익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영상을 본 학생들이 레슨을 요청하는 등 나 자신을 알리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덧붙였다.
JTBC의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밴드' 등을 통해 인지도를 높인 한국계 미국인 바이올리니스트 대니 구는 자신을 "관객을 위해 연주하는 전방위 아티스트"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각종 예능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린 그 역시 직접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대중과의 접점을 점차 늘리고 있는 중이다.
성진우 한경닷컴 기자 politpe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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