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적 성취를 절대 긍정하는 이들조차 마음 한 켠 의구심이 남는다. 혹시 부채로 거대한 모래성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근원적 두려움이다.
부채에 의존한 글로벌 경제는 지속 가능한 것일까. 미국은 언제까지 탈 없이 달러를 찍어내며 버텨줄까. 질문이 끊임없지만 대부분 애써 외면한다. 혹 해답을 찾아 나선 이들도 금세 자신의 작은 지식으론 역부족임을 확인하고 만다.
<부채로 만든 세상>은 깊은 성찰과 폭넓은 지식으로 ‘과잉 금융’의 문제를 파고든 저작이다. 사실 부채는 식상한 주제다. 유튜브만 틀어도 석학급 콘텐츠가 널려 있다. 미국 경제학자 담비사 모요는 미국의 ‘디폴트 선언’ 시나리오까지 제시한 터다.
그럼에도 신보성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이 책은 통독 가치가 분명하다. 실태 폭로, 경고라는 상투적 전개를 뛰어넘어 부채의 출생 비밀에 접근하고 있어서다. 저자가 지목하는 부채 경제의 주범은 ‘잘못 설계된 은행제도’다.
비판은 신랄하다. “은행제도는 한마디로 실패한 제도”라는 첫 문장부터 그렇다. 은행의 신용 창출 과정이 보편적 법 원칙에 어긋나는데도 국가가 특별 보호하면서 모든 문제가 잉태됐다고 직격한다. 저성장, 양극화 등의 부작용도 은행에 원죄가 있음을 역사적 배경과 이론적 틀로 착착 입증해 나간다.
은행 위기, 즉 뱅크런은 필연적·반복적이라는 게 저자의 일관된 관점이다. ‘부분준비제도’의 태생적 모순을 지적한다. 부분준비제도는 예금 10억원 중 1억원(지급준비율 10% 시)만 준비금으로 보관하는 영업 방식을 칭한다. 남은 9억원을 반복 대출하면 총 100억원의 신용(대출)이 창출된다.
부분준비제도 덕분에 은행은 제왕적 지위를 구축했다. 하지만 외부 충격이나 큰 부실이 덮치면 바로 작동 중지다. 10% 지급준비금이 금방 바닥나기 때문이다. 뱅크런 해법은 당연히 ‘100% 준비제’ 채택이다. 하지만 세계는 꼼수 처방으로 내달렸다. 유사시 유동성을 무제한 공급하는 최종대부자(중앙은행)와 예금보험제도를 만들어 예금자를 안심시키는 데 주력했다.
얼핏 묘수 같지만 정당성도 타당성도 없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사업 실패의 책임을 납세자에게 떠넘긴 격이어서다. 뱅크런도 외려 늘었다. 예금자들이 웬만해선 돈을 빼가지 않을 것임을 눈치챈 은행이 무모하게 영업을 확장한 모럴해저드의 결과다.
잘못을 눈치채고 부랴부랴 ‘금융 억압’으로 돌아선 게 1930년대부터다. 은행·증권업 분리, 대출 축소 등의 조치로 1970년대 중반까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은행 위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금융 완화’가 재개됐고 장기간 억눌린 신용이 다시 급팽창했다. 주식 부동산 등 자산가격 급등에 놀란 중앙은행이 금리를 급인상하면서 거품이 터졌다. 내상은 컸다. 일본, 미국을 필두로 세계는 부채 디플레이션 악순환으로 빠져들었다.
이제 은행 위기는 시스템 위기와 동의어다. 규제 완화로 자본시장까지 장악한 은행의 대차대조표 안으로 시장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잘 보여줬다.
은행 과보호 해제를 통한 신용시장 재구축이 저자의 제안이다. 은행의 통화보관업무(예금, 지급 결제)와 신용중개업무(대출) 분리가 핵심이다. 가능할까 싶지만 고전학파, 오스트리아학파가 주장했고 대공황기 미국에서도 ‘시카고 플랜’이란 이름으로 시도한 방식이다.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논지도 눈에 띈다. 정부가 통화 발행 재량권을 가져야 한다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정부를 선한 존재로 전제하는 듯하다. ‘효율적 시장가설’ 부정과 금본위제 옹호도 논쟁적이다. 하지만 모두 지엽말단일 뿐이다. 금융을 보는 깊고 신선한 통찰이 돋보인다. 월스트리트의 독주를 견제하는 완결적 담론을 금융 변방국에서 제시했다는 의미도 적잖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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