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뉴월 장마’라고 한다. 예전에 음력을 쓰던 시절에 생긴 말이니 지금으로 치면 양력 6, 7월께다. 장마 뒤에는 본격적인 무더위가 다가온다. 이즈음 급격히 늘어나는 말이 ‘피서’다. 피서(避暑)는 ‘피할 피, 더울 서’ 자를 쓴다.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으로 옮기다’란 뜻이다. 역대급 더위가 예상되는 올해는 해수욕장도 예년보다 빨리 개장했다. 요즘은 호캉스(호텔+바캉스)를 비롯해 다양한 피서 방법이 있지만 우리 조상들은 숲속 계곡물을 찾아 발을 담그고 노는 것을 최고의 피서로 꼽았다.
삼복더위를 쫓기 위해 예로부터 ‘피서’와 함께 ‘납량’이란 말을 많이 썼다. ‘납량’은 ‘들일 납(納), 서늘할 량(凉)’ 자로, 글자 그대로 ‘서늘함을 들이다’란 뜻이다. 여름철에 더위를 피해 서늘한 기운을 맞는 것을 나타낸다. 서울의 지역명 ‘청량리(淸凉里)’에 이 ‘서늘할 량(凉)’ 자가 들어있다. 조선 시대만 해도 이 일대가 수목이 울창하고 맑은 샘물이 흘러 늘 맑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고 해서 ‘맑을 청(淸)’ 자를 더해 ‘청량(淸凉)’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글자 뜻으로만 보면 ‘납량’은 더위를 피한다는 ‘피서’보다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담은 말임에 틀림없다. “우리 선조들은 부채를 이용해 돈이 들지 않는 납량을 즐겼다” 같은 게 이 말의 용례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 신윤복이 그린 ‘수하납량’(樹下納凉, 나무 그늘에서 서늘함을 맞다), ‘납량만흥’(納凉漫興, 서늘함을 맞아 흥취가 절로 일어나다) 같은 그림에서도 이 말의 쓰임새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납량’이라 하면 자칫 으스스하고 무서운 것으로 여긴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의미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2010년 전까지만 해도 여름철만 되면 각 방송사에서 경쟁적으로 ‘납량특집’ 같은 이름으로 공포물을 내보낸 데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발음이 어렵다. ‘납량’을 [납양]을 거쳐 [나뱡]으로 읽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남냥]이 정확한 발음법이다. 여기에 적용된 문법을 알아둘 만하다. 우선 우리말에서 ‘ㄹ’은 특정 자음 뒤에서 ‘ㄴ’으로 발음된다. 표준발음법 제19항 규정으로, 특정 자음은 ‘ㄱ, ㅂ, ㅁ, ㅇ’이다. 이를 ‘납량’의 발음에 대입해보자. 우선 ‘ㅂ’ 받침 뒤에 오는 첫소리 ‘ㄹ’은 자음끼리 결합하면서 ‘ㄴ’으로 발음된다. [납냥]이 되는 것이다. 이를 자음동화라고 한다. 이어서 첫음절 받침 ‘ㅂ’이 비음인 ‘ㄴ’의 영향을 받아 같은 비음인 ‘ㅁ’으로 바뀐다. [납냥 → 남냥]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을 비음화라고 한다. 표준발음법 제18항에 따른 것이다. 글자 ‘납량’이 발음으로 [남냥]이 되기까지에는 두 번에 걸쳐 동화현상이 일어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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