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영화 중 2020년 개봉한 ‘운디네(Undine)’가 있다. 운디네는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물의 요정을 말한다. 영어로는 온딘(Ondine)으로 인어공주 이야기와 유사하다. 인간과 영원한 사랑을 이루면 인간이 될 수 있지만 상대가 배신하면 그를 죽이고 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영화는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되 신비로운 체험을 암시와 복선으로 잔잔히 깔아놓는다. 운디네와 요하네스, 크리스토프 간 삼각관계가 펼쳐진다. 운디네는 이렇게 말한다. “베를린은 사실 물의 땅이었어요. 어딜 가나 축축했죠. 여기 처음 정착한 사람이 슬라브(Slave)인이었답니다. 베를린은 슬라브 말로 ‘습지의 땅’이라는 뜻이에요.”
물의 정령인 운디네. 같은 이름의 여주인공. 그녀의 직업은 베를린시청 도시문화해설사, 연인은 산업 잠수사다. 독일 최고 영화감독으로 인정받는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메가폰을 잡고 파울라 베어와 프란츠 로고프스키가 주연을 맡았다.
위에서 슬라브라 했던가? 슬라브 하면 클래식 쪽에선 주저 없이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체코)를 꼽는다. 무려 16개 슬라브 무곡을 토해낸 이다. 그의 대표 오페라가 ‘루살카(Rusalka)’다. 루살카는 물의 요정을 가리키는 체코어이며 60세 때 만년의 작품이다. 기막히게 아름다운 아리아가 나오는데 ‘달의 노래’ 혹은 ‘달에게 바치는 노래’ ‘Song to the Moon’이다.
“달님이시여, 저의 왕자님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그를 가슴속 깊이 사랑한다는 걸 전해주세요. 제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말해주세요. 그가 깨어 있는 모든 순간 나를 꿈꾸게 해주세요. 오, 달님이시여. 사라지지 마세요.” 루살카가 숲속에서 스치듯 만난 인간계 왕자님을 향해 부르는 애절한 노래. 보헤미아 특유의 서정적 선율이 우리 정서와도 맞닿아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명곡이다.
최고의 명연은 역시 체코 소프라노 루치아 포프(1939~1993)다. 24세 때 모차르트 ‘밤의 여왕 아리아’를 눈부시게 소화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래 딴딴하고 기품 있는 연주로 루치아 포프라는 멋진 이름을 각인시켰다. 긴 호흡을 바탕으로 풍성한 저음과 극고음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내공을 지녔다. 원래 배우 출신이라 금발에 푸른 눈으로 매혹이 배가된 면도 없지 않다. 그녀는 세 번 결혼했는데 첫째는 독일인 지휘자, 둘째는 영국 출신 음악감독, 셋째는 열다섯 살 연하 독일 테너였다. 54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몹쓸 뇌종양이 그녀의 육신을 삼켰다.
‘달의 노래’는 멜로디가 풍기는 분위기가 유려해 관현악 버전으로 자주 쓰이고 영화 OST에서도 인기가 높다. 그중 특히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1989)란 작품에서 근사하게 어울렸다. 깍쟁이 유대인 할머니와 흑인 운전사의 우정과 인간애를 그린 브루스 베리스퍼드의 이 영화는 오스카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휩쓴다. 제시카 탠디와 모건 프리먼이 주연을 맡았다. 꽃향기 그윽한 정원에서 FM 라디오를 평화로이 듣는 데이지 여사.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바로 이 곡 ‘달의 노래’다. 슈테판 솔테스가 지휘하는 뮌헨방송교향악단이 협연한 버전(1988). 체코어로 멋들어지게 노래하는 루치아 포프. 드보르자크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그래, 바로 이거야” 하지 않을까.
강성곤 음악 칼럼니스트·전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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