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근조(謹弔) 김민기

입력 2024-07-22 17:16   수정 2024-07-23 00:33


외환위기 때 코끝을 찡하게 했던 박세리의 ‘맨발의 투혼’ 공익광고의 배경음악은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고 하는 ‘상록수’다. 대학 시절 술집에서 떼창하던 ‘늙은 군인의 노래’, 통기타로 한 번쯤은 읊조려 봤을 ‘친구’,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애국가 다음으로 많이 불렸다는 ‘아침이슬’까지.

김민기는 타고난 예술가다. 경기중·고를 나온 수재인 그는 “경기중·고를 다닌 게 아니라 경기중·고 미술반을 다녔다”고 할 정도로 그림을 좋아했고,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들어갔다. 고교 시절 누나가 사준 클래식 기타로 음악에도 눈을 뜬 그는 음악에서 천부적 재능을 발휘했다.

대표작 중 상당수가 즉석곡이다. ‘친구’는 고교 때 바닷가로 놀러 갔다가 한 후배가 익사하자 급거 서울로 돌아오는 야간열차에서 썼다고 한다. ‘상록수’는 군 복무 후 위장 취업한 봉제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늙은 군인의 노래’는 군 시절 주임상사의 퇴역 기념가로 지어준 노래다. ‘아침이슬’은 대학을 휴학하고 고교·대학 동창인 김영세(이노디자인 대표)와 듀엣을 할 때 만난 양희은을 위해 작곡했다. 당시 양희은은 버스 회수권조차 친구들로부터 얻어 쓰던 때다.

그는 1970~1980년대 저항가요의 상징이었지만, 투사가 아니라 평범한 생활인의 삶을 살았다. 민통선 안에서 농사짓고, 때때로 탄광 광부, 김 양식장 잡역부도 했다. 40세 때인 1991년 이후 그가 평생을 바친 일은 대학로 소극장·극단 ‘학전’을 통한 문화운동이었다. 학전이 배출한 가수가 1000회 이상 공연을 한 김광석이다. 이곳 출신으로 영화계 스타가 된 배우들이 김윤석, 설경구, 황정민, 장현성, 조승우 등 이른바 ‘학전 독수리 오형제’다. 학전의 대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독일 원작자로부터 세계 150여 개 공연 극장 중 김민기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의도를 이해한 연출자라고 평가받았다.

김민기는 늘상 배우·가수는 ‘앞것’, 스태프인 자신은 ‘뒷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노래와 공연을 통해 시대를 이끌었던 그가 진정 ‘앞것’이지 않았을까.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흡사 묘비명 같은 노랫말이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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