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린 신작로를 따라 걸을 때 지나던 트럭이 저만치 가다 멈췄다. 어둠 속에서도 트럭이 뱉어낸 흙먼지가 자욱했다. 운전사 쪽 문이 열리며 타라고 했다. 중학교 1학년 다닐 때다. 기차 타러 가다 같이 통학하는 친구들이 짜장면을 먹고 가자고 했다. 그날따라 만두가 먹고 싶어 나만 빠졌다. 만두를 시켜 먹고 부리나케 역으로 달려갔지만, 막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하는 수 없이 30리 넘는 길을 걸어오다 중간에서 트럭을 만난 거다.
아버지 석재공장 트럭이었다. 차에 타자 아버지가 “왜 혼자 걸어가느냐?”라고 물었다. 사정을 얘기하자 아버지는 “왜 짜장면이 먹고 싶지 않았냐?”고 또 물었다.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같이 통학하는 친구 중에 싫어하는 친구가 끼어 있어 같이 가기 싫었던 건데 그런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바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 같이 가는 친구들은 의혹을 품게 되고 자칫하면 오해를 낳는다. 설사 만두가 그렇게 먹고 싶더라도 짜장면을 같이 먹지 않는 납득할만한 이유를 친구들에게 설명해 줄 수 없다면,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공장으로 차를 보내고 마을이 보이는 갈림길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동안 아버지 말씀은 계속됐다. 눈치채셨는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집요하게 물었다. 짜장면을 먹으러 간 친구들은 누구누구냐. 이름이 뭐냐. 같은 동네 친구가 아니면 그 애는 어디 사느냐고 캐물었다. 특히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는지를 세세하게 물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아버지는 “그 친구들을 만나면 하나하나 모두 만나 설명해줘라. 만두 먹은 얘기 빼고 아버지 편지 심부름을 깜박 잊어버린 게 생각나 전해드리러 갔었다고 둘러대라”라고 구체적으로 일러줬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자 아버지가 불러 “시키는 대로 했느냐? 친구들이 네가 한 독자 행동에 대해 의혹이 가셔졌느냐”고도 세세하게 묻고 답을 들었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선인들이 인간을 표현하는 한자를 만들 때 지구상에 가장 오래 사는 동물이라 세 개의 ‘열 십(十’)을 이어 ‘인간 세(?)’자를 만들었다. 훗날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자 나뭇가지에서 뻗어 나온 새순을 상형화해 다시 만들었다. 나뭇잎을 본떠 만든 게 지금의 ‘인간 세(世)’자다. “그런 인간들이 사는 동네를 ‘세상(世上)’이라 이른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마치 나뭇잎을 오므려 물을 마시듯 그저 지나치리만큼 조심조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날 이후 이제껏 지킨 고사성어가 ‘여세추이(與世推移)’다.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함께 변화해간다는 뜻이다.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굴원(屈原, BC 343?~BC 278?)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서 비롯된 말이다. 한때 삼려대부(三閭大夫)의 지위까지 올랐던 그는 제(齊)와 동맹해 강국인 진(秦)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적들의 모함을 받아 좌천되고 유배되었다. 굴원이 강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릴 때 그를 알아본 어부가 묻자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깨끗하고, 뭇 사람이 모두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 추방을 당했소이다”라고 했다.
저 성어는 그때 어부가 한 말에서 유래했다. “성인(聖人)은 사물에 얽매이거나 막히지 않고 능히 세상과 추이를 같이 한다오[聖人 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혼탁하면 어찌 그 진흙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고, 뭇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으면 왜 그 술지게미 배불리 먹고 박주(薄酒)나마 마시지 않고 어찌하여 깊은 생각과 고상한 행동으로 스스로 추방을 당하셨소?” 어부는 빙그레 웃고는 배의 노를 두드려 떠나가며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이나 씻으리라”라고 노래했다.
아버지는 “나뭇잎이 변해가듯 사람 사는 시대나 세상은 변한다. 그래서 함께 해야 한다. 변화에 융통성 있게 적응해가는 옛 성인들도 저렇게 법도를 지키고 사는 걸 어부도 안다”라고 새겼다. 아버지가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이틀에 걸쳐 길게 설명한 이유는 사회성이 쉽게 길러지지 않는 인성이기 때문이다. 사회성은 건강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이다. 사회성은 거저 얻어지는 인성이 아니다. 꾸준하게 스스로 터득해 몸에 배어야 하는 자율성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데 변하지 않는 게 인성이다. 서둘러 세심하게 손주에게도 물려줘야 할 소중한 성품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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