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대학 신입생들에게 충격을 준 사람은 세 명이었다. 리영희 교수, 김지하 시인, 김민기 작사·작곡가 겸 가수였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은 철저했던 반공세계관을 흔들었다. 김지하의 ‘오적(五賊)’은 세상의 부조리에 관심을 갖게 했다.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상록수’는 노래라곤 팝송과 통기타 가요만 있는 줄 알았던 이들에게 설렘을 느끼게 했다.
이 중 오래도록 대학생들과 함께했던 사람은 김민기였다. 시위 현장에서만 아니다. 대학가 술집에서, MT 민박집에서, 하숙방과 자취방에서 그의 노래는 오래도록 불리었다. ‘아름다운 사람’, ‘늙은 군인의 노래’, ‘식구 생각’, ‘꽃피우는 아이’, ‘작은 연못’ 등 지극히 서정적인 노래를 듣고 부르며 가슴시림을 느꼈다.
들으면 들을수록 공감 가는 가사에 김민기는 어쩌면 당대 최고의 리얼리즘 시인일 것이라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과 묵직한 삶의 궤적이 묻어나는 노랫말을 지었을 때 그의 나이가 고작 20대 초중반이란 걸 그땐 몰랐다.
그랬던 김민기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접했다. 황망히 떠난 그를 두고 사람들은 영원한 청년, 위대한 시인이자 아티스트, 예술 선비라 칭하며 안타까워했다. 다 어울리는 말이지만 가장 김민기다운 별칭은 ‘뒷것’이 아닐까 한다.
그는 대학로에서 ‘학전’이라는 소극장을 운영하면서 철저하게 배우나 가수 등 ‘앞것’들을 앞세웠다. 설경구, 황정민, 조승우, 이정은, 나윤선, 안내상 등을 앞것으로 키워내면서 자신은 뒷것이라며 숨었다. 언론 인터뷰도 극구 사양했다. ‘땅위의 조용필, 땅밑의 김민기’인 시절 조용필을 만나고도 노래 한 곡 부르지 않았다. 철저히 뒷것을 자처했다.
따지고 보면 어느 조직, 어느 모임에서나 앞것도 있고 뒷것도 있다. 뒷것이 없으면 앞것도 없다. 훌륭한 앞것 뒤에는 반드시 묵묵한 뒷것이 있다. 국내외 굴지의 기업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창업자 뒤에는 묵묵한 뒷것들이 있었다. 동업자나 창업공신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비록 앞것에 팽(烹)당해 본의 아니게 영원한 뒷것으로 남은 사람도 많지만 말이다.
세계적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 빌 게이츠 옆에는 동업자 폴 앨런이 있었다. 애플의 창업자도 스티브 잡스 외에 스티브 워즈니악과 로널드 웨인이었다. 벅셔해서웨이를 경영하는 워런 버핏에게는 영원한 뒷것 찰리 멍거가 함께했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김우중 회장이 대우그룹을 창업했던 1967년 자본금을 반분했던 건 도재환 당시 대도실업 대표였다. 미래에셋그룹을 일군 박현주 회장에게도 ‘좌(左)현만, 우(右)재상’으로 불렸던 최현만 전 미래에셋증권 회장과 구재상 전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이 있었다. 서정진 회장도 기우성·김형기 셀트리온 부회장 등 5명의 창업동지들과 함께 오늘의 셀트리온을 만들었다.
문제는 앞것과 뒷것이 뒤엉킬 때다.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이 앞것이 되려고 하거나 서로 앞것이 되려고 다투게 되면 조직과 기업은 엉망이 된다. 그에 비해 묵묵한 뒷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조직이나 기업은 발전한다. 우리나라가 10대 경제대국이 된 것도 산업전사로 불리는 묵묵한 뒷것들이 있었던 덕분이다. 김민기는 그것을 새삼 일깨워줬다. 묵묵한 뒷것들의 소중함 말이다.
삼가 ‘뒷것 중의 뒷것’ 김민기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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